감상성의 양식화는 가능한가-참을 수 없는 중경삼림의 지겨움과 신선함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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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중경삼림을 회화에 비유해 볼 수 있다. 화가는 대개 그림을 그릴 때 그의 가슴 속에 어떤 의식 혹은 감성의 덩어리, 즉 강렬하게 뇌리를 휘저으나 아직까지 뚜렷한 형체를 갖추지 않은 어떤 이미지, 자신이 그 형체를 갖추어 낳아주고 싶은 어떤 이미지를 담고 있기 마련이다. 그것은 풍경이나 인물 등의 자기 밖의 어떤 대상에 의해 촉발될 수도 있고, 외부의 직접자극 없이 화가의 머리 속에서 형성되어 화면으로 옮겨질 수도 있다. 물론 처음부터 미인美人 혹은 아무개 공작 혹은 대학로의 초상화가들이 그려주는 손님들 누구누구처럼 화가가 그린 대상만이- 양심적으로 말한다면 그 대상의 이름만이- 존재하고 화가 내부의 어떤 것도 표출되지 않는 그림들도 존재한다. 그럴 경우 형체는 그저 종이나 캔버스 위에 얹혀져 있을 뿐이며 화가는 결코 자기자신을 그림 속에 나누어 주었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기술자로서의 양심이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손의 기술의 써서 경제적으로 그림을 생산했을 뿐이다. 그림의 대상만이 유일한 목적으로서 경제적으로 담겨있는 이런 류의 그림들을 우리는 흔히 예술로 취급하지 않는다. 다만 추억의 사진첩에 끼워넣는 가족사진과 같은 것으로 혹은 썰렁할 수도 있는 벽면을 메꾸고 분위기를 맞추는 하나의 장식물로서 효용성을 인정할 뿐이다. 우리가 주목할 만한 작품으로 여기는 그림들은 이와는 다른 면모를 지닌다. 그림 속의 대상물이 곧 주제가 되는 것도 아니지만, 대상물을 제거한 후의 화가만의 어떤 것이 진정한 주제가 되는 것도 아니다. 대상들을 자신의 방법으로 재현해내는 화가의 작업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가, 어떤 이야기들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는가가 결국엔 우리가 주목하곤 하는 작품의 본성이 아닐까 한다.
우리들 각자는 서로 다른 사물들과 현상들을 보며, 그것을 다르게 호흡하고 다른 방식으로 서로 연결한다. 그것이 서로 다른 그림과, 언어와, 노래와 영화들을 만드는 것이다. 햇빛 잘 드는 오후 방안에 앉아 창문을 통해 똑같은 풍경을 발견했을 지라도 사람마다 다른 인상을 받고 다른 그림을 그리기 마련이다. 같은 사람이라도 유화로 그리는 것과 수채화로 그리는 것 혹은 사진으로 찍는 것은 전혀 다른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이제부터 우리는 세세한 양식의 영역으로 접근하는 듯한데, 어떤 특정한 장면을 그리는데 있어 화가는 이건 반드시 수채화로 그려야만 하겠다고 판단을 내리기도 하며, 이러한 필연성의 판정은 대개는 정당한 것이다. 유화로 그리지 말란 법은 없지만 특이한 그 색채와 질감을 표현하기 위해선 수채화가 제격일 때 굳이 어렵고 비효율적인 다른 길을 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는 물론 전혀 객관적으로 정해질 수는 없는 문제이며 미적 감흥의 폭과 방향, 이를 표현할 양식의 선택과 개발은 전적으로 그리는 사람 개인에게 맡겨져 있는 것이 현대미술의 상황이다.
왕가위 감독이 빌딩이 빽빽히 들어찬 중경숲을 그리는 방법은 무척이나 투명수채화를 연상시킨다. 보는 사람마다 뮤직비디오 같다고 칭찬 혹은 감탄 혹은 비난을 하는 흘린 화면이나 중력에 비스듬하게 기대어 반항하는 사각, 심하다 소리가 나올 정도로 자제하지 않고 마음껏 쓴 강한 노출의 역광효과들은 지나치기 때문에 오히려 당연한 것이 되어 전체를 일관되게 형성하고 있다. 이를테면 투명수채화 중에서도 원색을 잘 활용하고 세부묘사와 생략을 적절히 구사한 밝은 수채화의 성공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우 대상 자체의 아름다움은 논의 대상에서 빠져나간다. 어떻게 어떤 빛 속에서 그 아름다움을 그려내는지가 그림의 주제가 된다. 중경삼림도 상당히 이와 비슷한 경우에 처해있는데, 수많은 사람들을 반하게 만드는 이 영화의 중심 이야기는 뻔하기 그지 없는 낭만적인 사랑 이야기일 뿐이라는 것이 2시간 동안 즐겁게 관람한 후 자신이 사는 도시의 거리로 되돌아가는 사람들을 다시 한 번 놀라게 하는 사실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이쯤에서 왕가위 감독이 이 작품에서 실험하려고-혹은 장난하려고 했던 것은 '감각적인 것' 자체의 표현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특히 전반부에서 보는 이를 압도하는 중경 뒷골목의 격한 상황과 이를 표현하는 카메라 들고찍기, 흘림 기법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기교 자체다. 가슴을 파고드는, 그보다는 감상성 그 자체인 음악과 더불어 다가오는 영상은 우리 스스로가 그 속에 내던져지고, 다른 시간 다른 움직임의 차원 속으로 쫓겨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준다. 평온한 이성을 한순간 흔들어버리는 것은 때 아니게 나타난(뮤직비디오도 아닌 영화에 이런 기법이 동원된다는 것은 현재로선 파격이다) 흘림의 홀림인 것이다. 그러한 형식을 가능하게 한 것은 이야기 구성상으로는 금성무와 임청하의 거친 생활의 특성이겠지만 결국에 관객의 가슴을 때린 것은 그러한 급박함이 개념이 아닌 공간의 떨림과 장면장면의 호흡, 음악의 박동과 여운으로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지금까지의 홍콩영화나 헐리우드 영화의 대개의 방식과는 다르게 성공한 점이다.
후반부 양가휘의 집에서 노는 왕정문을 즐겁게 그려내는 부분에서 특히 거의 도배를 하다시피한 노출과 역광의 기교 역시 그렇다. 3, 4 분 보고 마는 뮤직비디오도 아닌 영화가 계속 강한 노출로 나간다는 것은 위험스러운 일이다. 지겨워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눈은 알게 모르게 관습의 강한 습관을 갖고 있어서 늘 보던 '자연스러운' 노출과 구도, 이미지 크기를 벗어나면 처음엔 색다르기 때문에 즐거워하지만 곧이어 과도한 자극에 실증을 내게 된다. 그 위험을 감수하고 왕가위가 찍어낸 영화는 일단은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지나친 것을 지나친 것으로 의도했다고 보여줌으로써, 또한 색조뿐만 아니라 구도와 사건전개 모두에 파격의 이미지를 심음으로써 지나친 감각주의라는 비난을 받는 대신 감각성 자체를 형식화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영화의 줄거리와 결합하여 말하자면 감상성 자체가 양식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사랑을 잃은 남자는 끊임없이 자기 주변에 널린 그 여자의 흔적들을 보며 뇌까린다. 비누야 넌 왜 그리 말랐니? 전엔 그리 토실토실하더니. 이 영화는 잃어버린 사랑에 대한 넋두리와 관객이 고대하는 앞으로 올 사랑의 기대가 작품 내용의 전부다. 상당히
감상적인 내용을 감각적이기 짝이 없는 영상으로 2시간 동안 그려주고 있는 것이다. 감상성의 승리라 할만하다.
감상성의 승리라 하는 것은 이 영화가 어디까지나 예술영화 취급을 받기 때문이다. 사춘기 소녀의 감상성에 의존하는 순정만화나 하이틴로맨스가 잘 해야 소모품, 많은 경우 쓰레기 취급을 받는 것을 생각할 때 아무리 빼어나다고는 하나 감상성 자체를 내용으로 하는 이 작품이 극찬을 받는 것은 한 번쯤 생각해볼 만한 일이다.
나는 물론 순도 100 %의 감상성으로 이루어졌다하여 한 작품을 예술이 아닌 오락물 내지 소모품으로 몰아붙일 생각은 없다. 오늘날엔 사실 대중예술이 아닌 어떤 예술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고방식이 남아있다는 것이 신비한 일이다. 하지만 더 신비스러운 것은 제아무리 대중성 또는 오락성, 통속성을 발휘하여 독자나 관객 대중을 사로잡겠다고 드는 상업적인 작품들도 많은 대중의 사랑을 받기가 힘든 진실 앞에서 전혀 대중적이지 못한 파격적인 형식을 가지고 나타난 '난해한 감독'의 작품이 대중의 열렬한 환호를 받는 현실이다. (관객동원 수와는 관계없이 중경삼림은 일단 반한 사람들은 '뻑'가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런 아이러니를 해결하는 한 가지 방법으로 우리는 통속성 혹은 감상성과 예술성 사이에 존재한다고 아직도 흔히 가정하는 대립 관계의 실상을 뜯어볼 수 있겠다.
대개의 문학비평가들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하는 대중소설의 천박한 감상성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 낭만주의 시대만해도 '진정한 문학'으로 환영받았던 성격이었다. 소설이란 것에 신의 뜻에 따라 살려 하는 결연한 의지와 고뇌 혹은 사회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려하는 교훈이나 도덕성의 설교 따위를 양념치지 않고 그대로 남녀들의 사랑이나 애증, 헷갈리고 부표하는 자아의 감성을 그리는 것이 훨씬 예술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사실 근대 소설이 탄생한 몸체 자체가 연애소설이었다. 서양이나 동양이나 할 것 없이 영웅담이든 연애시든 사건들은 처음과 끝이 별다른 유기적인 연관없이 순차적으로 구성되었음에 비해(주인공의 탄생과 죽음 정도가 일관성이랄까) 연애소설은 처음과 끝과 중간이 단일한 사건으로서의 일관성을 띄는 깔끔한 소설의 형식이란 것을 만들어내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시대는 또다시 바뀌어 그러한 깔끔함이 도전받고 줄거리의 해체나 사건의 해체로 소설이 이루어지던 때 또한 이미 지나갔다.
비평가들이 대중예술의 사랑타령과 낭만적 정서를 대체로 괜히 미워하고 깎아내리는 공식적인 이유는 그것들이 우리들이 주어진 현실세계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하지않고 단지 현실을 잊어버리고, 한 번 꾸고 사라질 백일몽에 잠깐 잠기게 하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위안의 기능이라 하는 것인데 이는 현실을 살아가는 데에는 긍정적인 기능을 한다고 볼 수 있으나 현실을 전복하는 기능을 하지는 않으므로 한편으로는 부정적인 측면을 지닌다. 누추한 일상을 지속시키는 공범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소설 한 편에서, 영화 한 편에서 현실전복을 기대하는 것은 지나친 욕심일 것이다. 예술은 일상에서 우리가 충족받지 못하는 미적인 감성과 현실화하지 못한 꿈을 대신 충족시켜 주지만, 그것은 언제나 여분으로서 존재하기로 하고 있다. 즉 삶에 일부를 차지하지만 실재가 아닌 허구로서 자신을 꾸미며, 그것으로서 현실세계의 존재와 같다고 여겨지는 자신의 존재를 허가받고 있는 것이다. 아니라면 주인공을 죽이는 작가가 살인죄로 기소되는 일이 발생하거나 혹은 반대로 독자들이 주인공의 결혼이나 죽음 따위에 아무런 흥미를 느끼지 못하거나 하게 될 것이다.
우리들에게 이미 픽션은 픽션인 것이고, 예전 동굴시대와 같은 마법의 바램은 아주 얇은 형태로만 남아 우리에게 '위안'을 준다. 영화의 해피엔딩은 '나에게도 저런 일이 생긴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감정상태로 우리를 이끌어가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특별히 자신에게 좋은 일이 생기지 않는다고 해서 저 영화는 거짓말장이야 하고 심통을 부리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허구라는 것에 대한 관용의 미덕이 발달한 문명인이기 때문이다. 도리어 영화는 약속하지도 않은 장미빛 미래의 허구성에 대해 과민반응을 보이는 것은 비평가들이다. 해피엔딩은 우리의 비판의식을 마비시킨다나 어쩌나. 물론 그들의 과잉방어에도 객관적인 이유가 있기는 하다. 예술작품이 어디까지나 허구로 인정되고 있기는 하나 그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들을 우리가 즐기는 이유 밑바닥에는 마법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심사가 깔려있다는 것. 의식적으로는 이건 허구야 하고 말하지만 무의식은 온갖 고통과 즐거움과 드라마를 맛보는 기쁨에 떨고 있다는 것. 하지만 이것은 작품의 유용성은 증명할말정 사회적 해악의 증거는 되지 못한다. 인간이란 육체는 생리적으로 억압된 욕망을 성취해 맺힌 것을 풀어야 하기 때문이다. 당장의 현실로는 가능하지 못하다면 영화를 통해, 소설을 통해, 만화를 통해서라도 풀어야 잘 살아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잘 살아나간다는 것은 단지 일상이나 생계의 유지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바라는 소망들, 자신이 강제당한 삶에 반하여 '이보다 나은 것'에 대해 두는 가치, 폭발과 자기실현의 기억들, 이 모든 것을 같이 보존하는 것이다. 예술작품을 통한 대리충족은 요즘의 지적 유행대로 현재의 소비를 위한 것이 아니라 반드시 미래가 개입되는 행위다. 자기가 바랄 수 있는 '최대한의 미래'의 한계치, 이는 한편으로 '최소한의 현재'의 한계치를 결정한다. 요즘 TV드라마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신세대여성 혹은 신세대 주부들은, 그 자체로서는 이미 진부한 캐릭터가 되어버린 듯하지만 80년대 이전의 '고난의 여인상'에 비교해 볼 때 나름의 의미를 지닌다. '신세대여성'은 한 번 유행하고 사라지는 일회적인 흥행 보조물로 끝나지 않았다. 이 캐릭터는 이전의 드라마들에선 부담없이 내보내곤 하던 착하고 잘 참고 운명에 말려들어가는 여성이나 그린듯 얌전히 있는 아름다운 여성이라는 캐릭터들을 그 존재를 의심케 하며, 신세대냐 아니냐 즉 변화된 사회의 가치를 받아들이겠느냐 고루한 캐릭터를 고수하겠느냐는 양자일택의 결정을 강요함으로써 역사적인 가치구획선이 되었다. 그리고 이는 또한 지금 세대의 최소치를 못박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요즘 여성들은 주부냐 직업인이냐는 선택사항이라고 (최소한) 생각한다. 픽션은 그것을 가능하게 한 현실만큼 자기가 가능하게 하는 현실을 만들어낸다.
픽션과 로맨스의 원죄를 사하고 나서도 여전히 남는 대중예술의 죄는 그 진부함이다. 이에 대해서만큼은 나도 두둔을 해주고 싶은 마음이 없는데, 나를 포함한 우리- 문화향유자 대다수는 천년을 한결같이 내려온 정제와 균형의 미보다는 뭔가 새로운 것, 강렬한 것에 끌리는 모더니즘의 유산을 물려받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더니즘(미적 모더니즘) 이후 세대다. 낭만주의 이후 세대이기도 하듯이.
*나는 여기서 '미적 모더니즘'이라는 말을 칼리니스쿠의 [모더니티의 다섯얼굴]에 나오는 개념으로 쓰고 있다. '낭만주의 이후'라는 용어는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에서 도움받은 개념이며 '모더니즘 이후'라는 용어는 통용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뜻과는 좀 다르게 이 글의 문맥 속에서 기능하는 나의 용어라는 것을 말해둔다.*
낭만주의 이후 세대의 특징은 전통이 뭐라하고 경제생활이 뭐라하든 자유연애 정도야 당연한 것
으로 안다는 것이며 이는 즉 개인이 '개인'으로 존재하기를 기대하는 정신이라 할 수 있다. 사실 프랑스혁명이 가장 성공적으로 달성한 것은 산업혁명도 자본주의도 휴머니즘도 아닌 낭만주의라고 할 수 있다. 낭만주의 이후 세대는 이러한 유산을 당연시하며 개인이라는 새로운 생과 인격과 힘의 주체에 대하여 의심하지 않는다. '당위적으로는' 개인의 권리가 인정되는 '민주주의' 나라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아직도 그 권리를 제대로 못 찾고 자본주의나 가부장제나 여성차별사상이나 각종 권위주의와 전체주의에 억눌리고 있는 상황에 대하여 '새삼스럽게' 다시금 공격을 한다는 것은 '모더니즘 이후' 세대에게는 어쩐지 진부하게 여겨진다는 것이 이 낭만주의 이후 세대를 다시 구분짓는 경계선이 될 것이다.
미술계에 있어선 이와 같은 상황이 아주 뚜렷한데, 서양 미술의 전통에 대한 주요한 공격은 이미 2차대전 전에 다 행해졌다고 봐야한다. 현대미술에 있어 문제가 된 것은 오히려 이미 전통을 다 부정해 버리고 완벽한 자유를 얻은 예술가들이 그 자유를 어쩔줄 몰라하면서 그렇다면 어떤 작품을 만들어야 하나 그 규준을 찾느라 혼자서 방황해야만 하는 상황이다. 모더니즘의 예술가들(입체파 표현주의 초현실주의 등)은 그래도 자기 앞에 용기있게 부정할 대상으로 인습과 전통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후의 예술가들에겐 이미 자기네가 할 어떤 투쟁도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에 맞닥뜨리게 되었고, 자기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어떤 양식도 가지기 어렵게 되었다. 여전히 화가는 그림을 팔아서 먹고사는 처지에 있는데, 화가와 대중들 사이에 공감할 수 있는 어떤 약속된 규준도 전통도 없고, 그렇다고 '당위적으로' 인정된 화가의 개성의 자유만을 추구하자니 남들의 이해도, 살림살이도 펴나가질 않는 것이다. 물론 과거에 인정받은 전통을 이용하는 것은 밥줄을 이을 방도가 된다. 심지어 전통에 대한 투쟁의 전통도 믿을만한 흥행요소로 통용된다. 그래서 우리의 응접실과 까페들엔 그렇게도 많은 인상주의자들의 작품과 칸딘스키, 몬드리안 및 그들과 비슷한 류의 키치들이 충실히 대상을 모사한 고전적인 작품들과 함께 종종 눈에 띄는 것이다.
낭만주의 이후 세대의 최대 난점은 개인의 해방, 그러나 모든 인습의 굴레와 자본의 법칙을 둘러쓴 개인의 단지 형식적인 해방이 가지는 문제다. 신분고하를 막론한 자유연애의 이념은 결혼은 곧 충실한 재산증식과 단일한 경제생활인 일부일처제의 현실 앞에 늘 위협당하고 있다. 여가시간을 통해 사적으로 해방된 듯한 개인은 여전히 '충분히 해방되지 못한' 영역의 억압을 느낄 수밖에 없으며 이것은 대개 소설을 통해 영화를 통해 만화를 통해 '잠깐의 탈출'이라든가 '진지한 탈출구 모색'이라든가 '새로운 세계의 설계' 등의 에너지로 분출된다. 이것이 리얼리즘과 통속소설로 구분되건, 예술과 영화로 구분되건 동일한 모순에서 분출되는 동일한 에너지에 기초하는 것이라는 점은 말할 것도 없다. 또한 그러한 분출이 근대소설을 특징짓고, 영화를 기초하는 것이다.
여기에, 모더니즘 이후의 딱지는 한 가지의 어려움을 더한다. 전통의 바다에는 무수한 양식들이 번성해 있는데, 예술가에게 '이건 이렇게 해야해'라고 올바른 기준을 제시해주는 권력은 존재하질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모더니즘 이후의 대중은 여전히 새로운 것을 원하는 것이다. 모든 실험이 이미 행해졌는데, 어떤 새로움이 가능할까. 이는 대중이 익숙한 것을 원하는 것 이상으로 처치곤란한 문제다. 익숙한 것만을 원한다면, 이미 발표된 추리소설과 비슷한 것을 다량으로 지어낼 수도 있고 벌써 히트친 영화를 몇번이고 리메이크하거나 수정변경하여 떼돈을 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것을 원한다면, 그리고 새로운 것을 만들자면 진실로 어려움이 따른다. 새로움이란 그저 겨울이 가고 봄이 오면 봄옷을 꺼내 입는 것과 같은 반복적인 쇄신이 아니다. 낭만주의 이후 세대로서 예술작품은 개인의 해방의 문제를 제기해야 하며, 또한 모더니즘 이후 세대로서 이를 변화한 세계를 앞서나가는 새로운 각도로 조명해야 하는 것이다. 다른 자잘한 새로움들 역시 중요하겠지만 '진짜 작품'을 만드는 구성요건은 이 두 요소의 결합을 필수로 하는 것이다.
이러한 어려운 조건을 만족시키기를 포기한 (혹은 생각도 않는) 대개의 대중예술들은 나름대로 진부함을 자기 속성으로 받아들이면서 몇 가지 비본질적인 새로움들을 영입하는 방식으로 해나가고 있다. 요즘 세상엔 액션, 멜로, 드릴러, 호러 등의 장르영화가 성행하며 추리소설과 무협지, 로맨스의 구별이 간편하고 손쉬운 여가를 약속한다. 독자들이 기대하는 바의 대강의 양식을 그려내
어 거기에 조금씩 다른 맛을 가미한, 천편일률까지는 아니라도 상당히 비슷하고 '그게 그거인' 작품들이 오늘날 자본주들이 투자대상으로 생각하고 있는 시장이다. 고뇌하는 회화와 달리, 대개의 대중예술은 무전통의 혼란 따위는 염두에도 없는 단단한 장르들의 모자이크를 구축하고 있다. 영화의 경우는 부정할 자체의 전통이 아예 없다는 점이 새로운 양식의 성립과 이의 독과점의 횡포를 더 쉽게 했다. 시대별로 비슷비슷한 모양새를 보이는 헐리우드 영화들이 이를 가장 분명히 보여준다. 이 포스트모던한 시대에도 여전히 다수의 극영화들 속에는 미인 혹은 여자라고 하는 단순한 캐릭터가 있다는 것을 상기해 보자.
처음부터 양식이 하늘에서 뚝 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영화의 경우, 개별 영화들의 독특함과 매력은 곧이어 다른 영화들에 의해 모방되며, 그러한 특징들을 공통분모로 하는 한 시대 또는 한 무리의 군이 형성되면 하나의 양식이 성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특징들은 외따로 떨어져 존재하는게 아니라 작품 전체의 모습을 특징지워야 한다. 이러한 양식화는 30년대 헐리우드 영화, 서부영화 같은 식으로 뚜렷한 유형을 낳기도 한다. 장르영화라고 불리는 요즘의 액션영화, 공포영화, SF영화들도 관객들이 그 영화를 선택하면서 어느 정도의 기대치를 갖는 강한 유형들이라 할 수 있다.
시대나 기능에 따라 형성되는 유형적인 양식 외에도 개인이 자기만의 양식을 가질 수도 있다. 미국이란 나라에도 마틴 스콜세지나 우디 알렌처럼 한 사람의 영화감독에 대해서 연구서가 발간되는 '작가'들이 있고, 이들은 나름의 양식들을 창조했다고 볼 수 있다. 새로운 양식은 창작하는 개인이 새로운 감정과 사고, 세계를 표현하기 위해 새로운 형식을 만들어 냈을 때 출발하며, 이것이 유행을 만들어 냈을 때 그 양식은 유형화되곤 하고, 한 때의 유행으로 끝나지 않고 여전히 남는 침전물들은 양식 속에 가라앉아 전통이 되는 것이다. (물론 영화의 경우 감독 개인이 아닌 영화사, 시스템 자체가 이 운동의 주체가 되기도 한다는 사실은 잊은 건 아니다) 그리고 기본 유형 아래의 하위장르를 형성하기도 한다. 예를 들자면, 도무지 되먹지 않은 틴에이저들과 살인마의 스토리를 가지고 [나이트메어]가 성공하자 그와 비슷한 수많은 아류작들이 생산되면서 '나이트메어류' 라는 공포물의 하위장르가 구축되었다. 이미 있는 양식의 틀을 깨고 새롭게 제시된 작품유형의 유행은 새로운 유형을 낳는다. 전통 이후엔, 양식의 파괴가 곧 양식 성립의 전제가 되는 것이다.
*잠시 용어를 정리하자면, 구미권의 style이란 말을 나는 '양식'이란 말로 썼는데, 이는 문학에서 흔히 '문체'라고 번역되는 style이란 개념을 아우르는 말이다. '양식'은 너무나 개인적인 양식에서부터 너무나 널리퍼진 유형에까지 다양하게 분포하고 있다. 서사구조로서의 형식체계와 양식체계를 구분하는 용법과는 좀 다르다.*
영화는 물론 고뇌하는 회화보다야 상당히 전통에서 자유롭다.(이제야 백년이 되었을 뿐이다) 만드는 사람들의 창의력이 중요하게 작용하며 늘 새로운 형식과 소재, 테크놀로지의 발전으로 스스로의 양식을 발전시켜온 예술장르다. 영화는 그렇지 않아도 상당히 회화보다는 문학과 비슷한 면모를 지니고 있으며, 감독의 독특한 개성이 드러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양식Style은 문학의 문체Style와도 비슷한 개인적인 성격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많다고 볼 수 있다. 달랑 컴퓨터 하나만 가지고 미리 입력된 수많은 배경과 인물들에 대한 정보를 바탕으로 '배우가 노동하지 않는' 영화를 만들어낼 공산이 커갈수록, 아니 그 이전에 비디오와 필름의 결합으로 손쉽고 값싸게 영화를 만들어낼 가능성이 커질수록 영화의 양식이란 것은 더욱더 개인적이 되어간다. 그러나 한편으로 영화의 역사를 강력하게 지배해온 유형화 역시 수많은 걸작들의 반란에도 불구하고 대개의 영화를 만들고, 또 성공시키는 규범을 제시함으로써 자신의 성채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여름에는 드릴러를, 겨울에는 크리스마스 영화를, 가을에는 로맨스를 그칠줄 모르고 만들고 히트시키는 헐리우드의 저변에는 이 유형적 양식의 막강한 힘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부함'이란 문제는 '유형적 양식의 생과 사'라는 메카니즘 속으로 와해되어, '현실적'이라는 면죄부를 얻는 것일까? 유형이라는 것이 진부함과 동일시될 수는 없다 하나 특히 영화에 있어 유형적 양식이 작품제작을 위한 불가피한 현실이 되고 마는 시점에서 유형이란 것에는 따라다닐 수밖에 없는 진부함을 인정해 줘야하지 않을까? 이 문제는 말 그대로 현실적으로 풀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끊임없이 유형을 만들어내고 마는 영화제작들의 메카니즘은 사실 새롭고 참신한 무엇을 만들고자 하는 노력을 원동력으로 필요한다는 점에서 즉 '운동의 관점에서' 진부함은 늘 처단 대상이 된다. 이 운동을 평면적인 공시성으로 위장한다면 진부함이 존재하는 한 단면을 얼렁뚱땅 인정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말 그대로 '반복'되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진부함을 어쩔 수 없이 지니고 있는 추리소설이나 액션영화라 해도 진부함 자체가 작품의 본성이 되지는 못한다. 정말 진부한 영화라면, 진부한 영화인 것이다. 재미도 없고, 돈내고 보고 싶지 않은 영화. 괜찮은 영화라면 이전의 다른 것들과는 뭔가 다른 이야기, 형식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아주 약간의 독창성만을 필요로 하며 대개를 '진부함'으로 채워야 하는 TV드라마와 같은 것들도 있지만 이는 작품이라는 것의 본령에서는 많이 벗어난 것들로 봐야할 것이다.
고전시대부터 '제대로 된' 작품이라는 것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익숙함과 규칙성과 동시에 독특함, 다른것과는 다른 재미와 멋을 가져야 한다는 규범은 살아있었다고 봐야한다. '진부한' 장르의 진부한 소재, 진부한 이야기들이 여전히 계속되고 또 꾸준한 인기를 얻고 있다면 동시에 그것은 작품을 진부하지 않게 하는 많은 요소들의 힘을 입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라는 것을 놓치면 안될 것이다. 다수의 대중이 '뻔한' 이야기지만 보고싶어 하는 소재와 이야기들이 사실 있다는 이유와 함께 말이다. 대중이 원하는 이야기, 감각들의 패턴을 그려내어 보다 편리한 대리충족의 구조인 장르영화를 만들어내는 영화산업의 투자심리는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영화제작과 향유의 지속적인 운동과정을 조금 나누어 생각해보자. 지금까지 진부함이라는 말로 뭉뚱그렸던 현상들을 시간진행에 따라 익숙함과 지겨움으로 나누어 바라본다면 어떨까? 먼저 좋은 것에 '익숙'해지고, 그 다음, 그 좋다던 것이 '지겨워'진다. 좋은 작품이라면 전자 위에서 출발하여 후자에 도달하기 전에 이야기를 끝내야 할 것이다. 반복되는 유형이 가질 수밖에 없는 진부함은 '익숙함'이란 것에 해당되어 진부함에서 떠나가고, 참을 수 없는 지겨움을 유발하는 작품의 진부함은 진부함의 본령으로 계속 남아 작품을 단죄할 것이다. 관객들의 기대치를 새롭게 만족시켜줄 수 있다면 그 영화는 익숙하고, 신선한 것이 될 것이고, 못한다면, 지겨운 영화가 될 것이다.
'진부함'이 이렇게 용서받지 못할 자로 판명난 후에도 한 가지 어려움은 남는다. 도대체 어디까지가 지겨움이고 어디까지가 익숙함일까? 인간의 보편적인 감수성의 기준이란 건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들의 가정에는 아직도 외국인들이 나오면 누가 누구인지 몰라 외화는 재미없다는 할머니 할아버지 세대에서부터 [펄프픽션]이나 [토탈리콜] 같은 영화는 너무 배반적이거나(주인공이 중간에 죽다니!) 어려워서(도대체 아놀드가 누구라는 거야?) 못보겠다는 아버지 어머니 세대, 리모콘 최소 세 개를 가지고 케이블 TV의 뮤직비디오와 함께 드라마나 광고 몇 편씩을 동시에 보는 신세대들이 혼재해 있다. 그렇다면 세대 따라 성별 따라 문화권 따라 개개인마다 저마다 다른 사람들의 감수성을 모두 만족시켜 주어야 훌륭한 작품이 되는걸까?
그러나 민주주의나 다수결의 차원이 아닌, 한 시대의 기존의 유형과 그것에 대한 지겨움 사이에서, 그리고 사람들의 의식과 테크놀로지의 수준 사이에서 '적절한' 또는 '멋진' 양식과 기법은 결정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의식'은 앞서가는 사람들의 주도권이 인정되나, 또한 다수의 향수에 젖은 사람들의 정서도 다변적으로 존재하는 의식들을 말한다) 뮤직비디오의 탄생설화를 보자. 영화는 멋있지만 너무 길다. 드라마는 재밌지만 너무 촌스럽다. 광고는 간결하지만 너무 짧다. 뮤직비디오는 이 기존의 극영화나 드라마, 광고에서는 가능하지 않던 새로운 화면과 새로운 서술체를 만들어내면서 나름대로의 장르로 인정받았다.
*테크놀로지의 발달 자체가 새로운 표현매체를 만들어내면서 양식을 주도하고 있는 요즘의 상황에서, 테크놀로지가 양식 자체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어떻게 '새로움'을 갱신하는데 일조하는지에 대해서는 나중에 글 하나를 더 쓰는 것으로도 부족할 것 같다. 이 글에서 이 부분을 논하지 않고 넘어가는 것을 용서해주기 바란다.*
우리가 대체적으로 '뮤직비디오같다'고 알고 있는 특징들은 강한 노출과 인위적인 조명, 사물을 왜곡시키는 광각렌즈와 인간의 시각한계를 시험하는 빠른 커트, 컴퓨터그래픽을 종종 사용하는 몽타주, 그리고 노래의 줄거리와 상관없이 끼어드는 재미난 발상의 스토리의 겹침 등이다. 십년 남짓한 MTV의 역사에서 벌써 뮤직비디오는 독자적인 예술장르로 인정받고 있다. 우리나라의 수준에서 눈을 돌려 미국 뮤직비디오의 걸작들을 살펴보면 그 파격성이나 놀라운 발상, 깊이 찌르는 통찰력에서 왠만한 영화의 가치를 뛰어넘는 것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뮤직비디오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가 명심해야할 일이 있는데, 그것은 이 장르는 적어도 아직까지는 반드시 다른 장르들에 대한 대립물로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즉 드라마의 지루한 화면구성에 대한 지겨움, 인내를 실험하는 극영화 길이에 대한 싫증, 너무 적나라하게 자신을 파는 광고에 대한 역겨움 위에서만 뮤직비디오의 신선함과 재미는 유지되는 것이다.
예술 작품으로서는 용서못할 진부성에 작품의 독창성이 의존하고 있다니. 이것은 그다지 놀랄 일도 아닐뿐더러 피치못할 진리도 아니다. 진부성은 그 나름의 등급을 가지고 살아가거나, 아니면 사라져야 하는 것이다. 한 시대, 한 시기의 독창적인 것은 처음엔 기존의 양식을 깸으로써 그 임무를 다하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른 파격에 의해 또다른 진부함으로 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원래 인간의 역사발전이란 그런 것이 아닌가. 우리 인류가 만약 20세기말 지금까지 신석기 혁명의 전율이나 산업혁명의 은혜 속에서 감사하고 있다면 애초에 그런 발전들은 없었을 것이다. 여전히 우리는 농산물을 먹고 살지만 시대는 시뮬라크르의 세계로 돌입하고 있으며, '뻔한' 이야기들은 무수히 독창적인 작품들의 뒤에, 혹은 그것이 되비추는 거울 속에 존재하고 있다. 드라마가 지겨워 광고를 보고, 액션영화가 지겨워 [펄프픽션]을 본다. 헐리우드식 영화에 물려서 가끔씩 소위 예술영화라고도 하는 키에슬로프스키의 영화를 보지만, 이미 그것도 지겨워 [짚시의 시간]이나 [달콤쌉싸름한 초콜렛]의 전위적인 의고체擬古體를 즐기고, 아예 [애정만세]의 테러적인 전위에 감동한다. 그러나 그 '지겨움의 역전'은 '익숙함'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소한 한국의 TV광고만큼은 외국의 뮤직비디오를 따라가는 영상을 자부하고 있고, 파격적인 TV광고의 영상에 길들여진 자만이 영화 [중경삼림]을 즐길 수 있다고 단언할 수 있는 것이다. [중경삼림]의 '뛰어남'은 뮤직비디오와, (우리나라의 경우엔) CF의 익숙함과 지겨움 위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이제 우리는 대중성과 예술성의 이분법에 현혹되지 않고, 양식의 성립과 파괴 사이에서 작가 개인이 선택하는 가능성의 폭과 위태로움을- 독창과 진부 사이의 좁고도 깊은 크레바스!- 생각하면서 [중경삼림]을 다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중경삼림]은 내가 보기에 아주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고 있다. '뮤직비디오의 키치'와 '아주 멋진 시대물' 사이에서.
뮤직비디오의 현란한 영상은 이미 신선하다 하는 감탄의 단계를 넘어서서 관습적인 심한 노출과 조명, '감각적이라 알려진' 각도과 이미지 크기, 지루한 광각렌즈, 기술조작으로 악명높은 지겨움을 낳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선보이는 대개의 댄스뮤직비디오들의 현황이 정확히 그대로인 '뮤직비디오의 진부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아직 영화에서는 그 시도가 전면적이지 못한 뮤직비디오적인 기법들을 작품 전체에 쫙 깔아놓은 왕가위의 시도는 과연 성공적이었는가. 내가 아는 한 친구는 잘 생긴 남자도 아니면서 머리를 기르고 다니는 영화과 학생인데, [중경삼림]을 수없이 본 그의 견해로는 이 영화는 지겹기 그지없는 순사기같은, 적어도 장난같은 영화라는 것이다. 장난이라는 점에서 그와 나의 견해는 일치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나의 결론은 적어도 '현시기의 성공이라는 점에서는 [중경삼림]은 성공적이라는 판단이다.
지겹기 그지없다는 평은 나름대로의 타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 정말로 뮤직비디오 같은 강렬한 색깔과 왕노출, 역광, 지구의 중심을 옆으로 치워버린 사각, 급작스러운 크기의 이미지들은 그야말로 영화전체를 뒤덮고 있다. 10일간의 짧은 촬영 기간을 그대로 반영하듯, 다른 영화들과 비교하면 파격적인 화면들이 영화 안에서 서로 대어보면 똑같은 몇 가지 각도와 기법으로 금방 정리가 된다. 엇비슷한 '강한' 혹은 '예쁜' 혹은 '사람 미치게 하는' 화면들이 줄줄이 늘어서있다. 지금 나는 수미일관이라해서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 즉 지겨움을 유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 영화를 두 번째 봤을 때 나는 간혹 가다 화면에 질려버리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렇게 재미있는데도.
뮤직비디오 같은 영상은 뭇영화의 정숙함을 조롱하는 파격의 이미지로 다가올 수 있지만, 또한 '참을 수 없는 뮤직비디오의 뻔함'을 유발할 위험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왕가위는 그러한 위험을 감수하고 그냥 영화를 예쁘장한 색깔로 찍었다. 키치가 되기 일보 직전에서 건진 예술영화랄까. 확언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지만, 내 예상으론 [중경삼림]은 90년대 중반 지금만 아름다울 수 있는 영화다. 인간의 시각적 관습이 아무리 뮤직비디오적으로 조정된다해도 그 한계가 있기에, [중경삼림]의 영상은 익숙한 양식이 되는 '주류'가 되지 못할 것이다. [중경삼림]의 영상은 어디까지나 뮤직비디오에 대한 영화의 반응으로서 존재한다. 뮤직비디오 읽기, 새로운 감수성 읽기, 혹은 (오랜 영화-서술체의) 격의 파괴로서만 의미있는 것이다. [중경삼림]은 뮤직비디오가 아니며 뮤직비디오로서는 존재할 수 없다. 영화로서만 그 독창성이 자리를 갖는 것이다. [중경삼림]의 의미는 非뮤직비디오다. 양식의 파괴라는 양식의 성립.
왕가위 감독이 의식적으로 뮤직비디오에 대한 거리감을 예정하고 영화를 찍었다고 주장하고 싶지는 않다. 그냥 아름답게 하자 하고 밀고나간 것이 이런 결과를 낳았다고 보는 것이 옳을 듯 싶다. 그러나 그 '지나침'이 작품 스스로의 본질을 결정하도록 한 것은 당연히 의식적이었다고 생각된다. 다른 방법은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미 왕가위가 아니니까. 왕가위의 뛰어난 점은 그 지나침을 아름다움으로 유지할 수 있었던 내러티브의 절묘한 결합에 있다고 볼 수 있다. 파격적이라 '소개'되는, 지겹도록 반복되는 영상을 그냥 밀고나갈 수 있었던 것은 감각적인 영상의 단순성을 능가하는 이야기구조의 단순성 때문이다.
[중경삼림]이라는 이야기를 한 마디로 말하는 것은 쉽다. 그것은 사랑 이야기이고, 그 구성요소는 단순하다. 사랑, 그리고 그것의 '지연'이다. 지연을 독백이라는 말로 불러도 좋을 것이다. 보통의 이야기 전개였으면 단숨에 무너졌을 그 테러적인 영상을 효과있고, 아름답게 하는 것은 분절적이면서도 전체서술을 이끌어가고 있는 독백들의 강렬한 생명력이다. 독백들은 마치 아포리즘처럼 각각이 하나의 단장들을 이루지만 여느 영화처럼 스토리 틈새에 붙어있는 일화로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곧 영화 자체, 내용을 이루고 있다는 말이다.(그러나 그 이전에 새로운 형식이다. 왕가위의 새로운 양식을 이루는 주요 진원지일 것이다.) 순간순간 파격적 영상의 지루함을 쇄신하는 것이 그 독백들의 참신성이다. 물론 두번째 이야기에서는 왕정문의 매력이 모든 것을 무마하는 강력한 재미요소가 되기도 한다. 왕정문의 사랑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관객들의 바램이 시간을 두고 조금씩 현실화로 다가갈 때, 우리는 순도 100 %의 감상적 드라마를 형성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 기다림 역시 지연의 재미에 들어감은 말할 것도 없다. 편지를 전달받기를 거부하고 나중에야 그것에 도달하는 양조위의 행위야말로 이 영화의 주제를 웅변한다. 지연. 우리는 로맨스를 좋아한다. 그리고 곧 극복할 수 있으리라 믿어지는 로맨스의 진행은 정말 즐거운 일인 것이다.
대개 목표가 있고 그것의 달성을 지연시키는 여러 장애로 이루어진 스토리라인은 동서양의 전래동화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저승으로 간 피붙이를 되찾으러 가는 어머니의 고난 등등. 그러한 서사구조를 가장 현대적인 그리고 현재적인 영화에서 발견하는 것은 참으로 재미난 일이다. 왕가위는 자기 식으로 뮤직비디오와 전래동화의 결합을 성취한 것이다. 그의 성공에서 확인하는 진리는 이것이다. 파격적인 형식은 파격적인 내용과 함께 할 때 유의미하다는 것. 거기에서 양식은 피어난다.
이 속에서 그가 의문의 여지없는 낭만주의자의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것이 우리를 기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진부하지 않은, 현대적인 낭만주의의 승리는 언제나 우리를 즐겁게 한다. 그는 낭만주의 이후 세대로서, 그리고 모더니즘 이후 세대로서 부끄럽지 않은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이것은 순전히 반성적인 작품이다. 뮤직비디오의 지겹도록 예쁜 영상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는 미련스러운 애정의 표현이라고나 할까, 아니면 단 하나의 부끄럽지 않은 집착인 실연의 자기향수에 대한 고백이라고나 할까. 실세계에서의 자기실현을 보여주지 못하는 나약한 개인인 작가가 자기의 독백 속에서, 자신의 좁다란 환상을 바라보면서 완벽히 키치적인 방법으로 키취가 되기 딱 알맞은 자신의 감상성을 드러내고 있는 단 하나의 작품라 할 수 있다. 키치적이라는 것은 사랑을 중얼거린다는 것이다. 보편적인 이해와 만족을 바라지 않고 단지 나의 이 독한 정서에 동참할 몇몇의 공감만 얻어도 만족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바보스럽고 또 부끄러운 고백일지도 모르지만. 왕가위의 영화들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짙은 자기고백은 한편으로는 자기도취적이면서, 그의 독백으로 끝나지 않고 우리의 감수성을 건드려 놓는다는 데에서 소통하는, 작품이 된다. 사람들은 그의 시선을 따라 그의 집착을 따라 그가 재배열해놓은 사물들과 순간들을 쫓아가고, 사랑하게 된다. 너무나 잘 알려진 감정들과 이미지들을 그는 단지 자기식으로 말했을 뿐인데, 우리는 지겹지가 않게 된다. 새롭고, 가슴아파하고, 기뻐하게 된다.
왕가위는 새로움을 만들어냈는가? 나는 서두에서 그가 감상성을 양식화했다는 결론을 미리 던져두고서 이를 입증하려고 했다. 그가 끊임없이 키치로서 얘기했지만 결국 작품은 키치에서 벗어난 의식성-자기반성적인 성격을 가진다는 나의 주장도 한편으로는 논박당할 수 있다. 자기를 의식하는 키치일 뿐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지겹다 - 새롭다 이 미묘한 판단을 하는 기준은 결국 변화무쌍한 우리의 감수성이라는 점에서 내 주장은 다소 불안한 기반 위에 있다. 그러나 왕가위가 오늘날의 감수성 한가운데에서, 번득이는 한 순간의 새로움을 만드는 데에 성공했다는 사실은 마음놓고 주장해도 될 것 같다. 키치의 최고치의 반영으로서, [중경삼림]은 딱 한번 가능한 새로운 양식을 성립하고 사라져간다. 그것은 다소 위험스럽지만 즐거운 개인의 양식이며, 우리세대 자신의 자기반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걸 보면서도, 눈앞의 삶을 끌어당겨 쓰다듬으며 희망을 남겨놓는 낭만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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