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주클럽 [나는 나] 뮤직비디오
- 원한의 페미니즘을 뛰어넘는, 새로운 주체형성 19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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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뮤직비디오의 경향은 한참 잘 나가던 영화적 내러티브의 진행에 물린 탓인지 오로지 때깔 하나만으로 밀고 나가는 것을 많이 본다. 물론 별로 고찰의 가치가 없는 조명많이 쓰고 때깔 좋고 로맨스버무리인 R&B나 발라드류의 뮤직비디오는 빼고 하는 얘기다. 90년대에 한해서 얘기할 때, 주로 대상에 오르는 것은 얼터너티브락의 부류에 속하는 것들이다.
얼터너티브락 뮤직비디오에서 그렇게나 영화적 내러티브 도입이 두드러졌던 이유를 난 이렇게 본다. 음악이 너무 꽉 차있으면, 내러티브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그러나 니르바나 이후로 얼터의 비상하도록 지루한 사운드를 맛갈스럽게 꾸며주기 위해선 적당한 수준의 때깔과 화면구성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도 톡쏘는, 혹은 괜찮기라도 한 아이디어로 3, 4분을 채워줄 '이야기'였다고 본다. 이러한 측면에서 최고봉을 이루는 것은 Collective Soul의 [The World I Know]였다. 차가운 파란색을 다시없이 가슴아픈 슬픔의 색으로 찍어낸 이 작품은 아주 단순하고 예측가능한, 뻔한 이야기면서도 그 음악과 적당히 어울어지는, 잘 만들어짐--작품성에서 그 매력이 우러나온다.
그 전후로 수많은 영화적이라기 보다는 이제는 뮤직비디오적인 내러티브 병행의 뮤직비디오들이 양산되었고, 드디어 radiohead의 [Just]가 출현하게 된다. 영화적 내러티브 방식에 대한 가장 뛰어난 조크이자 90년대에 발전한 뮤직비디오가 이제 전환할 때가 되었음을 알려주는 바로크라고 난 평하고 있다. 그리고 엄청나게 재미있다. 자막을 이용해서 극적인 효과를 거두는 그 긴장감 넘치는 숭고미, 여기에서 점차 상승하던 극은 막판의 반전을 통해 아무 말 없이, 자기가 하고 싶은 얘길 한다. 셈 레이미의 영화 [퀵앤데드]나 크리스 누난의 즐거운 호주 영화 [꼬마 돼지 베이브]에서 절정을 이루는 썰렁한 숭고미의 완벽한 뮤직비디오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이후로 영화적 내러티브 병행의 양식으로서 특기할 만한 뮤직비디오가 안 나왔다는 점을 난 주장하고자 한다. 좀 괜찮은 수준은 있었지만, 역시 앞선 뮤직비디오들을 능가하는 작품은 없었다. 뛰어난 작품들은 다른 방식으로 나왔다. 영화 [시계태엽오렌지]에서 분위기와 요소들을 따온 Blur의 [the universal]이 숭고미와의 긴장성에서 성공을 거둔 작품이었고, radiohead의 [fade out]은 고속촬영을 이용한 아름다운 흑백영상과 느리고 빠른 속도 속의 무한한 고독의 벌판으로 퍼져나가는 집시의 이미지로 태어난, 아직까지도 능가할 작품이 없는 걸작이다.
나의 논리적인 추정으로는 그 다음에 아마 역작이 나온다면 테크노쪽에서 나와야되지 않을까나 한다. 이는 더 이상 소진된 얼터너티브락에서 음악은 물론 뮤직비디오 역시 기대하기 어렵다는 판단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뮤직비디오 역시 아날로그 시대에서 전적인 디지탈 시대로 넘어가야할 지점에 이미 다달았다는 사실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은 테크노 음악은 주류로 꽃피진 않았는지, 컴퓨터그래픽을 이용한 몇 개의 우리가 볼 수 있는 비디오들은 그다지 '이거다' 싶은 것은 없다. 최근 테크노 바람을 락쪽에서부터 일으킨 U2의 의 경우, 뮤직비디오는 전적으로 아날로그적인 감수성으로 만들어져있다. 이것도 나쁘진 않지만, 아직까지는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작품은 나오지 않은 것이다.
여러 가지 작품들이 각기 다른 아이디어로 승부를 거는 중에, 복고풍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둔 Beaste Boys 의 [Sabotage] 정도가 정말 끝내주는 작품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대개는 '아이디어의 난립상태' 라고 부를 만하다.
국외가 그 정도이니 국내는 뭐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예전보다는, 즉 케이블방송이 처음 전파를 탔던 2년전 보다는 확실히 '나아진' 이라고 할 수 있는 국내 뮤직비디오들은 하지만 여전히 참을 수 없는 지루함으로 염해진 채 뮤직채널들을 썩히고 있다. 광각, 컴퓨터 색칠, 댄스가수의 고정적인 율동, 혹은 기타리스트의 몇 개 뽀다구,, 더 이상의 레파토리가 나오는 경우는 딱 하나 보았다. [끼리끼리]에서 왕년의 오드리헵번처럼 머리에 두건을 뒤집어쓰고 왕붕어 썬글라스를 낀 코러스걸들의 희안한 수직, 수평배열 씬은 짜릿하기까지했다. 하지만 딱 이 한 장면뿐, 나머지는 역시 참을 수 없는 뻔함으로 꽉 차있다. 나머지는 언급할 가치가 있는 것이 거의 없다. 공일오비의 돈쳐바른 뮤직비디오 [2001년 모노리스]는 돈들인 만큼 잘 될 가능성이 많은 비디오였지만, 내러티브의 수준이 아무래도 딸리고,---그 느끼하기 이를데 없는 [그린파파야 향기]를 베낀듯한 장면들--- 결정적으로 음악이 너무 시원치 않았기에, 단지 돈들인 사실만을 기록할 가치가 있을 뿐이다.
이렇게 근래에 국내외를 통틀어 영 내 마음을 움직이는 빼어난 뮤직비디오를 보지 못하던 차에, 예상치도 않은 국내 비디오에서 이렇게 깨는 경우를 당하기란 참으로.. 쇼킹하지 않을 수 없다.
주주클럽의 [나는나] 뮤직비디오는 상당히 심심한 발라드 사운드에 은근히 깨는, 남다른 세계관을 가진 주인공의 서정적인 자기독백의 가사를 실음으로써, 일단 오디오상에서 기본수준을 확보했다. 뮤직비디오의 전체적인 평가는 그다지 하고 싶지 않다. 상당히 뻔하고 지루하고 그냥 국내비디오 수준으로는 나쁘지 않은, 그런 화면들만이 대개를 이루고 있다. 그러다가 뒤로 갈수록 삐구가 나는 화면이 아니라, 불현듯 나타나는 보석같은 샷 두어 개에 약간 놀라게 된다. 그러더니.........
마지막의 황금빛 전광판을 바라보고 섰는 파란 겨울색 속의 한 여자. 노래가 끝나니 이 여자는 약간 쓸쓸히 자기가 안은 애를 바라보고, 역시 쓸쓸히 뒤돌아 걸어간다. 음.... 이 여자는 그러니까 사회적으로 문제시된다는 미혼모가 아닌가?? 맨처음 봤을 때의 쇼킹함은 정말이지..... 기뻤다. 이제 우리나라도 좀 나아지려나? 하는.
제목과는 달리 이 노래는 아이덴티티에 대한 노래가 아니다. 나는 아이덴티티 이후의 노래라고 부르고 싶다. 노래의 서술주체는 계속해서 자기의 인생관, 애정관을 피력하면서 난 그렇게 살아, 이게 나야 하고 주장하고 있지만, 이 여자는 실상 자기의 아이덴티티를 주장하는 사람이 아니다. 이 여자는 시간이 지나면 다른 사람을 사랑하면서도 또 그 한 시기에는 자기 사랑에 충실한, 늘 옮겨가는 주체다. 이 여자는 옮겨가는 삶, 늘 사랑하는 삶으로서만 자기를 만들며, '머무르지 않는다' 만이 자기라고 하는 주체를 한정하는 특질이다. 누구의 딸 또는 누구의 애인 혹은 마누라로서 자기를 한정하지 않는, 아이디를 부정하는 새로운 형태의 안티-아이디를 이 여자는 홍콩버전으로 들으면 완전히 뽕짝인 이 연약한 발라드에서 유출하고 있는 것이다. 이야말로 정말이지... 쇼킹한 일이다. 일부러 지어낸 약간의 사회비판적인 가사를 청소년의 불편불만 가사와 섞은 댄스가요들이 우리의 귀에 테러를 가하고 있는 요즘, 아무리 주주클럽이 표절을 많이 하고 그래서 그들은 책임없는 뮤지션이라고 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나는 이 노래의 의의만큼은 인정해 줘야 한다고 본다.
이 심심한 발라드와 폭탄처럼 숨어있는 단단한 기반의---주체의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감상주의로 표출되는 정신의 기묘한 결합은 대책없는 위험한 타협으로 의심받을 수도 있다. 한 때 휩쓸려 가질 수 있는 생각들,, 좀 나이먹으면 다 관두고 시집이나 가버릴 노는 애들이 나중엔 후회할 생각하는 거에 불과하지 뭐... 하는 평가절하가 그것이다. 하지만, 이 노래는 뮤직비디오가 자신을 받쳐주기 때문에, 절대로 오해의 소지가 없는 길을 가는 것이다.
노르스름한 전광판 속의 노래하는, 자유로운 여자가수를 바라보는 겨울옷 둘러입은 여자는 아름다왔고, 애는 이뻤다. 그 여자가 보인 쓸쓸함은 자기 애정의 결실을 혼자서 거두려하는 여자에 대해 편집증적인 증오를 보이는 사회의 냉대 때문에 지치고 위축된 모습일 수 있다. 단지 혼자서 돈벌고 애 키우느라 힘들어서, 아니면 애 키우느라 남자를 못 사귀어서 외로울 수도 있고. 하지만 여자의 그런 쓸쓸함은 '그러니까 현실은 혹독한거야, 빨리 한 남자 정해서 시집들 가' 라는 메시지를 주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보기론 분명히,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되지만, 그 여자는 자기 삶을 긍정하며, 자신의 사랑과 자신의 선택, 자신의 인생관 모두를 긍정하면서 자기 가던 길을 갔던 것이다.
과연 여자가 혼자 애를 낳는다는 것은 단지 고통과 질병의 수렁 속에 직통으로 빠져든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현실 속의 미혼모는 상당히 그런 경향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뮤직비디오에 출동하여 자신의 시선을 우리에게 빌려준 이 미혼모는 그 노래와 그 노래를 부른 자신만만한 신세대여자에게 어려운 현실만이 아닌 또 다른 진실을 말해준다. 이 여자는 자기에서 시작하는 새로운 계통수의 시작이다. 즉, 남자들의 재산관계와 남자들의 부양--노동력 재생산 써비스를 위한 가정생활과 전혀 상관이 없는 또 하나의 가족, 모계를 창출하는 것이다. 전혀 아무런 다른 이유없이 오직 사랑이란 이유 하나로 생겨나고 이어지는 계통수, 이는 백퍼센트 가부장라는 재수없는 제도를 향한 안티-제도를 표현한다.
재미난 것은 가부장제의 완전부정의 역할을 해내면서도 이 여자는 끝까지 사랑밖엔 난 몰라의 노선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 이는 남자들에 대한 증오로 기본동력을 얻어 배타적인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모든 전투적인 원한의 페미니즘에 치명타를 먹이는, 은근한 반란인 것이다. 노래 가사는 계속해서 주장하기를 자기는 자기가 사랑했던 그 모든 사람들을 사랑한다고 한다. 만났을 땐 더없이 아름다운 관계를 이루지만, 헤어지면서는 흔히 오해와 권태와 불만, 원망, 미련으로 점철된 끝을 보는 많은 이들의 경우를 볼 때 이 여자는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남자들에게 당하고 사는 것을 한탄하는 것으로 시작될 페미니즘을 위한 여지가 전혀 없이, 어떻게 남자들이 사랑이란 이름으로 여자들에게 부당한 요구를 하는가를 고발할 여지가 전혀 없이, 이 여자는 남자들에게 전혀 당하지 않으며, 사랑의 끝맺음에 대해서도 전혀 미련을 갖지 않으며 단지 지나간 일에 대해서는 좋은 기억만을 간직한다. 한 마디로 참으로 편하게 사는 여자로,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서 전혀 관여치 않으면서도 그를 충분히 사랑하는 기술에 대해서는 나도 배우고 싶을 정도다.
사랑밖엔 난 몰라는 여기서 사랑 땜에 자기를 다 내어주는 바보같은 여자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나와 다른 상대를 인정해주고 상대와 다른 나를 여전히 유지하는, 깨끗한 주체들끼리의 만남과 나눔을 가능케하는 윤리다. 깨끗하단 얘기는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는 뜻이다. 나랑 잤으니까 날 책임져야 해, 아니면 넌 이제부터 내꺼니까 어디 다른데 눈돌리기만 해봐라 하는 소유권 주장의 윤리와 정서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다. 물론 난 사랑밖엔 난 몰라로 세상사는 일이 충분하다고는 주장하지 않는다. 다른 것들도 있다. 하지만 현실적인 애정관계에 있어서는 이 이상의 방도는 그다지 개발되어 있지 않다고 볼 뿐이다.
페미니즘은 이러한 길을 개척하기엔 너무나 무겁다. 여자들은 자라나면서, 학교와 사회를 체험하면서 재수없게 자기네를 눌러대는 사회제도와 관행, 남자들의 시선과 잡담, 여자들의 뒷공론에 대해 포기하든지, 싸우든지, 무시하든지 어쨋거나 어떤 대응을 해야한다. 페미니스트들의 소원과는 별도로, 대개의 여자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대의 타협을 하면서 생을 꾸려나간다. 이미 한 결혼을 물리기란 쉽지 않고, 이미 들어선 가족친지관계에서 등돌리기 역시 어려운 일이고, 돈버는 일은 쉬운게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인간은 일상적으로 싸우는 데에는 물려있는 탈-동물이기 때문이라고 난 생각한다. 분노는 짧다. 이것이 길다면 금방 간기능에 이상이 와서 오래 살 수가 없다. 그래서 분노보다는 기쁨, 되도록이면 지속적인 즐거움을 가져오고 촉발하는 행위들로 삶을 꾸리려고 하는 경향을 인간은 가지고 있다. 단지 색깔있는, 혹은 21세기형 닭장 속의 행복에 만족하고파 하는 여자들이 많은 것은, 아무리 일상사 속에 자단한 스트레스들을 축적하는것이 장기적으로는 위험한 일이라 하더라도, 절대적인 고립을 자초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아직도 서로 이를 잡아주면서 유대관계를 유지하던 유인원의 기억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은, 절대 고립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대개는 타협하는 것이다. 아직 없는 페미니스트왕국을 건설할 그날까지 허리띠를 졸라매고 금욕과 절제, 고독의 나날을 버틸것을 여자들에게 기대할 수는 없다. 레즈비어니즘도 여러 방편 중의 특이한 하나를 제시할 뿐이지, 모든 여자들에게 열려있는 해결책이라고는 볼 수가 없는 것이, 이미 다 자란, 이성애문화에 물들어버린 여자들에겐 별도움이 되지 않고,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동성애적이거나 양성애적이거나 변태적이거나 하는 다양한 문화적 체험을 시켜주는 일은 언제나 가능할지 알 수 없으며, 기본적으로 남녀양성은 상당히 오래된, 기본 포맷이기 때문이다. 다른 것은 그 변주로서 시작한다. 생물학적인 역사를 무시하고 일을 진행하기 위해선 우리는 아예 인간이 아닌 다른 종을 만들어야한다. 인간에 대해서는, 기본으로는 받아들여야한다.
* 그래서 나는 싸이버펑크가 페미니스트들이 전유물로 착각하던 문제들을 가로채가며,
해결할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이라고 생각한다. 고립을 원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기계와 교류하면 된다.
네트를 통해 다른 관계들을 모색할 수도 있다. 지금 기계의 수준은 아직 기계지만, 곧이어 벌어질 풍경은
우리가 SF소설에서 보던 것을 훨씬 뛰어넘을 것이다. 남자나, 섹스를 원한다면 품질좋은 딜도나,
거의 인간과 다름을 느낄 수 없는 짝인형을 하나 사와서 써도 된다. 굳이 이런 문제 때문이라면,
배나오고 냄새나고 멋대가리없는 남편이랑 아웅다웅 살 일이 없는 것이다. 인격적인 교류나 전통적인
사랑과는 별도로, 성적욕망은 존재하며 늘 해결을 필요로한다. 치사하게 남자가 필요해서 사귀어놓고
난 너밖에 없는데..하며 징징거리는 여자들은 더욱더 설 자리가 없을 것이다. 늘 기술발전은 사회윤리를
뒤바꾸는 데 공헌하곤 한다. 실은 윤리를 다이어트하기 위해 기술을 발전시키는 거지만. 하지만
이 얘기들은 오늘의 주제를 약간 벗어나므로 이제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
주주클럽 [나는나]는 이러한 과거와 미래의 역사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 전체흐름은 알 수 없지만, 자기의 행동양식은 알고 있고, 이 행동양식 속에는 미래의 흐름이 씨앗으로 저장되어있다. 이런 식으로 사회는 변화한다. 생태계 역시 그렇겠지만,,, 자기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며 자신의 의지로 행동을 선택하는 자율적 주체에 대한 환상은 사회전반에 포스트모더니즘이 확산되면서 더이상 설 자리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우매한 대중을 슬퍼하는' 멍청한 인문주의자의 불안 또한 근거없는 것인데, 대중은 더이상 먹고입기를 걱정하는 대중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중은 어떤걸 어떻게 먹을까, 어디를 가고, 어떻게 입고, 어떻게 사랑할까를 고민한다. 근본적으로 인간은 겁장이기기 때문에 함부러 목숨걸고 싸우러 나가지 않고, 근본적으로 인간은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에 사회전체와 자신의 관계를 잘 알기 어렵다. 하지만 이기적인 그들의 행동은 이렇게 재미난 결과를 낳는 것이다. 설사 대중들 중 아무도 자기네들이 실지로 무엇인지를 모른다해도, 그들은 이미 새로운 사회적 관계망을 형성할 준비를 착실히 하고있고, 그곳에서 주체가 형성되는 것을 촉발하는 문화상품들을 우리는 간간히 마주칠 수 있다. [나는나]도 그 하나라고 본다. 이 노래는 금방 사라질지 모르지만, 이 뮤직비디오는 곧 너무 후진 것이 되어 다들 쳐다도 안 보려고 하게될테지만, 또 다른 식으로 표출되리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다. 좀 빨리, 답답한 드라마나 대책없는 영화 대신에, 대책있는 영화나 미니시리즈로도 표현되는 걸 보았으면 한다.
짐 모리슨은 '난 고통의 왕이다' 라고 외쳤다.
하지만 도어스를 즐겨듣는 나는,
우리 모두가 '쾌락의 박사' 가 되었으면 한다.
그것이 내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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