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자아를 가진 자의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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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얼리 나가보자, 유시진 연구 v. 1.0
1. 까놓고 가는 즐거움-쿨핫
2. 말
3. 자아를 가진 자의 슬픔
4. 등가의 원칙 - [마니] 해루의 철학
5. 다른 것 - 유희
왜 슬픔을 간직하는가? 어찌할 수 없는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웃사이드]의 작가의 말을 보면 중요한 것은 외부상황보다 그걸 받아들이는 '자
아'라는 말이 나온다. 수인, 해루, 동경, 타마라... 유시진의 인물들은 자아가 강한
사람이 많다. 그래서 많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강한 자아를 가진 사람이 멋있다고 해서, 그것을 선망하는 어린 친구가 있다는
얘기를 듣는다면, 그들은 조금 씁쓸해질 것이다. 자아는 그들이 원해서 얻어진 것
이 아니라, 어쩔수 없이 피부를 뚫고 들어온, 버릴 수 없는 어떤 것이다.
나의 몸이라고 하는 유기체는 다른이들과 분리되어 떨어져있다. 다른 사물들이나
생물들뿐만 아니라 같은 종류에 속하는 사람들과도, 심지어 가장 가깝다는 가족들
과도 다른, 독립된 개체다. 그 사실이 많은 동물들에게는 전연 슬픔을 일으키지 못
하나 인간에게 있어서는 때로는 깊은 절망감마저 일으키는 이유가 된다.
인간은 자신을 돌아볼 수 있고 자기와 다른, 대립하는 세계를 바라볼 수 있다. 오
로지 홀로 세계를 대적해야하는 고독감에 미쳐버릴 수도 있는 생명체는 지구 위에
인간뿐이다. 가족이나 혈연, 공동체의 유대는 개개인을 끊임없는 사회적 행위와 관
계 속에 밀어넣음으로써 행복하게, 혹은 생각없이 해줄 수 있다. 그러나, 그 속에
서조차도 얼마든지 혼자된 고독감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다. 나는
그들과 다른 '나'라고 하는 자아를 유지해야 하며, 나는 다른 것이 되고 싶어도 여
전히 지금의 나로 머물러 있으며 내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에게 응답을 해야한다.
인간이 무리짓지 않고 홀로 살 수 있거나 개미나 벌처럼 오로지 공동체를 위해
살고죽는 성격이었다면 물론 자아의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그 대신 문명도 이런
복잡성도 없다. 인류가 처음으로 자아의 개념을 획득한 것은 대략 b.c. 8세기에서
b.c. 3세기 사이라고 한다. 불교와 이데아, 절대신이 출현한 것이 이때다. 인생의
고뇌, 자아의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 모든 연을 끊고 무아의 경지에 이르려고 하는
것도 이때부터다.
공동체의 강한 유대에서 벗어나서, 오로지 개인으로서 권리와 의무를 가지고 인
생에 나서야 하는 근대이후의 개인들에겐, 자아는 모두에게 필수품인양 따라붙는
문제다. 어쩌면 민주주의란 코카콜라보다는 먼저 자아의 대중화인지도 모른다.
개인들이란, 비교적 최근에 생겨난 것이다. 자본주의 이전엔 토지와 혈연으로 단
단히 묶인 사회, 그런것들이 필요했다. 개인은 임금노동이 필요한 자본주의 작동방
식이 요구하는 기본 골격이다. 매여있는 사람들을 가지고는 자유로운 임금노동자
를 만들 수가 없었기에, 근대화과정은 봉건적 관계를 파괴했고, 새로이 개인의 권
리와 책임에 기반한 사회를 만들었다. 서양에서 이미 형성된 자본주의를 받아들인
입장이 된 한국을 비롯한 동양권은, 기존의 가족의 유대를 충분히 해체하지 않은
채로 적용했고 그러나 이것 역시 적절한 사회적 노동력의 재생산 양식으로서 기능
한다.
이른바 한국의 상황은 복잡하다. 한편으론 개인으로서 사회적 요구를 받아들여
성공적으로 해내야하며, 또 한편으로 가족과 친족의 전통적 요구 또한 무시 못한
다. 개인은 고독을 느끼는 동시에 너무 번거롭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하면서 살기
를 포기하지 않는 한, 자기를 둘러싼 기존의 사회적 관계들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인간이 초기부터 꾸준히 받은 교육은 부모와 주위 사람
들이 기뻐하는 것을 열심히 해보이는 것이었고, 아이는 여기에서 보람을 느끼도록
되어있다. 개인의 의지로써 이것을 벗어난다 해도 그 버릇은 쉽게 가시지 않는다.
본래 인간이 사회를 만든것은 그들이 소심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겁이 많으며 지
금까지와 다른 방식으로 행동하기 위해서는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실은, 개인으로
서 보장된 책임과 권리를 이행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된 짐이 지워져있는 것이
다. 여기에 덧붙여 자기 생을 능동적으로 살아갈 수 없게 한다고 여겨지는 사회적
관계들이 달라붙으면, 그에 반하여 더욱 완전한 개인주의를 원하며 달려가는 편향
을 어찌할 수 없다. 유시진도 그것을 가지고 있다.
이기적인 게 과연 나쁜건가? 초기부터 끊임없이 볼 수 있는 물음이다. 자기중심
성이란 것에 대해 그가 갖는 생각이 '당연한 것'인지, '어쩔 수 없는 것'인지, 난 모
르겠다. 이기주의, 그리고 고독, 이것이 내가 원하는 '최소한의 짐의 무게'다 라고
말하는 것일까? 물론 여기에 무지막지한 하나의 변수가 끼어들 수 있다. 사랑이다.
자아와 사랑에 대해서는 [베이지톤 삼색체크]에서 아예 명강의를 들려주고 있는
데, 사랑이 과연 고독한 자아를 구원해줄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긍정과 부정 사이
에 미묘한 스펙트럼들을 달리는거 같다. [아웃사이드]에서는 외롭고 슬픈, 갇힌 영
혼을 밖을 향하도록 이끌어주는 것이 사랑의 힘(!)이었지만 [마니]의 해루는 끝까
지 자아의 통제를 잃지 않으려는 치밀함으로 자기 행위(사랑을 쫓아가는)를 정당
화한다. 결과적으로 볼 땐 사랑의 승리(마니의 승리)가 아닐까 하지만.
[쿨핫]의 동경이는 섬처럼 떨어진 자아들 사이에서 '미약하고도 불완전하며 미덥
지 못한' 사랑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냐고, 상당히 비관적인 견해를 지니고 있으나
그것 말고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쓸쓸한 '어쩔 수 없음'의 결론
을 내리고 있다. 동경의 그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1000살이나 먹은 해루와 맞먹
을 듯한 막강한 자아는 슬픔이라는 약점을 가지고 있다. 슬픈 것들엔 그만 마음이
움직이고 마는 동경이의 막강한 자아라는 것은, 남들보다 1000배는 예민한 감수성
으로 자신을 인지한다.
'내 마음을 움직이는 어떤 것들 사이에 존재하는 일관성'
그것은 어찌할 수 없는, 고립되지 않고 온곳에 네트를 대어놓더라도 역시 자아를
갖고 있기에 가질 수밖에 없는 슬픔이다. 자기 몸과, 마음을 가졌기에 배어드는 슬
픔. 버림받은 존재라는 것은, 사랑받지 못한 아이들이라는 몇몇 개인의 특수한 사
정만은 아니다. 부모에게 사랑받고 자란다고 칠 수 있는 대다수 독자들은 그들을
안 되었다고 느낄지 모르지만, 속으로는 그들처럼 되고 싶어한다. 연결을 끊고 싶
은 것이다. 그것은 당연한 삶의 과정이며, 그것을 통해서라야만 스스로 독립된 완
전한 인간으로서 자긍심을 회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독, 자아를 가진 슬픔이라는 것에 대해 우리는 두 가지 상반된 태도를 갖고 있
다. 그것은 두려운 것이지만은, 그것을 통해서만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
는 '다른이'이라고 하는 귀찮으면서도 살가운 존재에 대한 곤혹스러움과 상통한다.
어떻게든 자신을 위해 행동을 취해야한다. 그래서 영전은 똑같은 문제 앞에 부딪
혔을 때, 동경이와는 반대의 노선을 택한 것이다.
'그들이 없으면 난- 압사해''
영전이라는 인물이 보이는 공허는 근대이후의 사회에서 개인이 맞닥뜨리는 예민
한 고독이다. 간결한 설명 그대로 개인은 다정한 사회적 관계를 만들므로써 고독
을 벗어나려 한다. 자기를 지키면서도 미칠것 같은 고독을 피해가기 위한 이 이중
적 태도라는 방법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대다수 개인들에게서 볼 수 있는 전
략이다. 본래 겁많고 간사한 종족인 인간은 위장술과 자기기만술이 뛰어나기에 대
개 무리없이 사회적 관계라는 걸 유지하고 살아갈 수 있다. 거짓말에 서툴고, 이
아무하고나의 다정한 관계를 참을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해선 '사회성이 부족하다'고
들 한다.
한국 사람들은 서양인들이나 일본인들과 비교해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전혀 없기
로 손꼽히는 편이다. 가정이나 친족 간에 쏟는 사랑과 정성을 생각할 때 전혀 이
해가 안 갈 정도의 무신경함만을 공중도덕에서는 보여준다. 이건 아마도 한국인들
의 개념에 '타인'이라는 게 없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남이란 존재는 개념에 없으
므로 괘념치 않는 것이다. 그런데 그 진한 '정'은 어떻게 되는 건가? 물론 정많은
민족이지만 그것은 '우리'에게만 한정된다. 우리집, 우리들을 위해서는 열심이지만
남은 무슨 해를 받던 상관하지 않는다. 인맥이 없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고, '우
리'가 없으면 모든 사회적 행보가 제한받는다. 한마디로 '우리'를 만들고 유지함으
로써 고독을 방지하고 생존을 보장받는달까. 이곳은 자본주의화가 덜 되어서 그런
건지, 무슨 이유인지, 남이 개인으로서만 사는 것을 못 참아한다.
동경이를 따돌리는 학교아이들의 '정상적인 반응' 역시 '우리'를 유지한다는 첫번
째 생존술에 위배되는 인자에 대한 린치라고 보여진다. '우리'의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지 않으니 불쾌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혼자서는 혹독한 자연환경과 포식자들
앞에서 무력하기 짝이 없는 소심한 유인원들이 만들어낸 가장 뛰어난 해결책이었
던 사회가 지금의 개인들에게는 완벽한 덫이 될 수 있다.
이에 대해 완벽한 개인주의의 실현을 주장하는 것이 의심없이 올바른 일인가 하
면, 그럴만한 근거라는 것도 그다지 확실치는 않다. 근대사회의 이상주의, 민주주
의나 자본주의가 그것을 지지해줄 것인가? 지금의 문화와 사회를 통제하는 기본
메카니즘인 자본주의는 독립된 개인을 요구하지만 유사친족관계의 촘촘한 그물망
역시 요구한다. 어느 쪽이던지, 자본주의 운동에 보탬이 된다면 좋은 것이다. 그래
서 끊임없이 사회와 가치들을 해체하지만, 한편으론 금방 따라잡을 수 없이 멀리
달아나는 것을 막기 위해 고리타분한 가치들을 여전히 지지해준다. 그래서 무료
mp3의 범람에 대해 논란이 일고 인간복제에 대해 경종의 목소리들이 떠들어대는
것이다.
남과 다르게 사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꽉 막힌 사회는 지금까지 성공적으로 지구
상에 번영을 누리며 살아온 인류의 특성, 노하우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만약에 지
금이 그와는 다른 방식이 필요한 때라면, 그 방식을 주장하고 근거를 만들어낼 수
있다. 어느 식이 되었건 중요한 것은 '원하는 것'일테니. 어떤 것을 당위적으로 주
장할 수는 있지만, 우리를 그것으로 만들 수는 없다.
나의 곤혹스러움을 솔직히 말하자면, 이미 사회의 변화는 고립된 하나의 인격을
가진 개인이라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쪽으로 치닫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입장에선 이미 개인으로서 우리가 획득해버린 고독과 자유라는 것을 그냥 버
릴 수는 없다. 우리의 고통과 외로움, 피로, 기쁨과 정열이 모두 여기에 걸려있으
니까. 다른 영혼 간에 공감을 향해 나아가든지, 합일을 향해 나아가든지 간에 기존
에 가지고 있는 이것을 다 떨굴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데, 이것을 주장할 사회적
근거는 사라지는 추세다.
우리는 생긴 대로 살 권리가 있으며,
인생이란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찾아가는 과정이어야 한다. ........... ?!
개성 시대라는 말은 이미 80년대에 등장했다. 하지만 아직도 개성은 사회화 과정
에서 무참히 짓밟힌다. 어쩌면 단지 예쁜 핸드폰 악세서리를 팔아먹고 철따라 생
산한 옷들을 다 팔기 위한 선에서만 인정되는게 아닌가 한다. '생긴 대로 살 권리'
를 과연 기존 사회는 물론, 지금 태동하고 있는 유전자혁명의 사회가 인정해 줄
것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장담을 할 수가 없다. '인생이란 진정한 자기 모습을 찾
아가는 과정이어야 한다'는 주장도 간단한 유전자조작 앞에서는 속절없이 빛을 잃
을지도 모른다. 아주 낡은 것과 전혀 새로운 것이 공존하고, 결합하는 것이 문명에
선 흔한 일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구래의 악습'이라고 하는 종류를 새로운 무기
로써 쓸어낼 수 있는 가능성은 과연 얼마나 될런지, 낙관할 수만은 없다.
어쩌면 개성 역시 사이버펑크 시대에 맞춰 꼬리를 감추어야 하는 근대사회의 유
물, 잠시잠깐의 유행일 뿐일지도 모른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아직 나도 뾰족한 답
이 없다. 분명 힘겨운 개인의 자아라는 것의 완성 대신에 도처에서 보이는 것은
스타크래프트의 열풍, 네트를 통한 새로운 주체의 형성가능성이다. 지금 인간이 지
구 생명계 위에 건설하고 있는 것은 전자기-생명계이다. 어쩌면 우리가 개체-자아
를 가진 마지막 인종이 되지는 않을까 하는 약간의 두려움을 난 가끔 갖곤 한다.
물론, 어떻게 지구가 돌아가던 간에, 우리가 끝까지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욕망이
다. 원하는 것을, 개인으로서의 버릇이든 '인간과 로버트는 평등해요' 든지 간에 실
현할 수 있는 현실적 조건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쓸 수 있는 건 뭐든
지 간에, 재활용해서라도 쓸 수 있다. 민주주의건, 인권이건, 남녀평등이건 간에.
유전자지도를 둘러싼 전쟁이 거대 파시즘을 출현시키는 걸 막기 위해서라면, 낡은
개인의 권리라는 문서도 소용이 되는 한 써먹어야 될거다. (그러나 그를 넘어선
다른 차원의 사고가 형성되어야 하는 건 당연한 거다.) 자유의 권리라는 것,,, 아주
좋은 구실이 될 수 있다.
루다는 그런 면에서 좀 희망적이다. 대안적 모델을 제시할 수 있는 성격이랄까.
그렇게나 남과 다른 자신을 쉽게 받아들이고, 단순하고 명쾌하게 자기 생긴 대로
살아나간다. 전혀 타이트하지 않은 자아라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 놀랍다. 수용에
거부반응이 없는, 좋은 것을 보면 쉽게 자신을 잃고 닮을 수 있는 능력- '늘 이동
하는 주체성'과 유사한 면이 있다.
그래서 동경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들 사이에 존재하는 일관성-슬픔이 아닌 것으
로 맺어질 수밖에 없는 루다와의 관계는 동경이 지금의 자신의 모습에서 다른 것
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준다. 즐거운 것은, 이 전혀 엉뚱한 두 성격이 만나
화학반응을 일으키던 혼성물을 만들던 간에 나오는 결과는 최소한 상호보완, 크게
는 새로운 에너지 창출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쿨핫]의 맨앞 키위파티에서 당당히 써놓은 '언어로 표현할 능력 없음'이라는 딱
지는 최소한 루다가 말의 눈속임에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한다.
동서고금 많은 젊은이들이 자기의 생각을 표현할 언어를 구사하지 못하여 자기가
원하는 것을 약속한다고 생각되는 남들의 말발에 넘어가 헛된 피를 흘렸던 것을
생각하면, (남의) 말을 믿지 않고 (자기) 직관을 믿는 루다식 줏대는, '고독한 자아'
대신 '행복한 주체'가 가능하다는 쪽에 걸고싶게 한다.
-> 등가의 원칙 -[마니] 해루의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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