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락천사] 타.락.키.치
- 우리는 왜 광각에 대한 사랑을 멈출 수 없나? 19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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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타락천사를 즐겁게 봤다. 하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타락천사]는 왕가위 감독이 스스로의 덫에 걸려든 영화라는 판단은 확실해져 간다.
[중경삼림] 없이는 [타락천사]를 말할 수 없다. [타락천사]가 [중경삼림]의 후속편이기도 하지만, [타락천사]는 [중경삼림]에서 왕가위가 이룩해 놓은 '감상성의 양식화'의 기반 위에 가능한 것이고, 그 어법을 통해 문장을 구사하고 자기 얼굴을 만들어가지고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중경삼림]의 그 기묘한 줄타기가 없이는 [타락천사]의 왕광각의 지나침은 성립이 되지를 않는다.(지나침이 너무 심하기 때문에) 하지만 [타락천사]야말로 그 심각한 지나침으로 인해 자신과 [중경삼림]의 정체를 폭로하며 [중경삼림]이 기껏 획득한 예술성 혹은 작품성을 무너뜨려 버린다. 난 본래 예술성과 작품성을 동일어로 여기지는 않지만, 이 상황에서는 같은 게 되어버린다는 생각이다. 그럼 지금부터 내가 좋아하는 왕가위의 정체?를 폭로!?해 보기로 하자.
1. 참을 수 없는 뮤직비디오의 지겨움
난 CATV를 통해 수많은 뮤직비디오를 보고있는 케이블키드로서(왠 키드? 흠 ... ^^;) 벌써부터 뮤직비디오에서 진행된 지겨움과 새로운의 순환작용을 지켜보면서 이 얘기를 한다. 뮤직비디오는 이젠 독립된 장르로 인정받고는 있지만, 본래 뮤직비디오가 하나의 장르로 자리매김되고, 많은 이들의 혼을 빼먹는 즐거운 에술이 된 것은 이것이 영화도 CF도 아닌 새로운 물건으로서, 충분한 기량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즉 길고 긴 장편영화에 대한 보답으로서, 뮤직비디오는 아주 짧다. 3분에서 5분 정도를 넘지 않는다. 물론 CF도 짧다. 하지만 너무 짧다. 충분히 감각적인 영상과 '깨는' 스토리를 즐길 수는 있지만 아무래도 열심히 녹화까지 해놓고 보기에는 심히 짧고, 좀 진중치가 못하다. CF로는 아무래도 미비한 내러티브의 전개도 충분히 할 수 있고, 영화로는 아무래도 어려운 파격적인 영상실험도 할 수 있고, 또 당연한 얘기지만, 누추하기 짝이 없는 삶을 유치하고 예쁘게 칠해대는 TV드라마보다야 확실히 재미있고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뮤직비디오가 '그래서 좋다' 면 너무 편파적인 얘기일까?
왕가위가 쓰는 기법이 뮤직비디오를 본받았다는 얘기는 너무 들어서 지겨울 것이다. 아는 사람은, 그보다는 느끼는 사람은 다 느낄 수 있다. 멀쩡한 신세대감각과 너무 멀지만 않으면 말이다. 하지만 주축선은 뮤직비디오가 아니다. 요점은 '사랑'이다. '감각적인 영상기법'이라고 말들 하는 빛의 과잉과 사선의 과잉과 공간의 과잉과 변화의 과잉, 그 과잉 속에서 자기 모습을 내놓는, 물질에 대한 사랑. 이 사랑이 없으면, 뮤직비디오를 알아볼 수 없고, 왕가위를 즐기고, 제대로 볼 수가 없다. 그의 영화가 원하는 수용층의 감수성은 바로 이 물질에 대한 사랑에 집착하는, 점잖은 TV와 격조높은 영화의 화면에 염증을 내는 한 줌의 무리들, 신감각파들의 감수성이다.
어디까지나 나의 주장은 어떤 예술품이든지 수용층의 감수성과 맺는 관계를 통해 자기를 만든다는 것이다. 뭐 새로울 건 없는 얘기지만 왕가위 영화의 성공을 얘기하기 위해선 꼭 필요한 얘기다. 전에도 [아비정전]이나 [열혈남아]에서 왕가위는 전통적인 영화기법과 비교하면 파격적인 기법들을 선보였었고, 스텝프린팅 기법에 있어서나 자아의식 강한 고백체에 있어서나 '지나친 감정의 오버'들을 능란하게 감동으로 연결시키는 경지가 거의 신에 이르렀었다. 그런데, [중경삼림]에 이르러서는, 이전의 영화들이 '관습적인 영화'를 적으로 삼은 것에서 더 나아가 아예 아군으로 삼았던 뮤직비디오 자체를 적으로 삼고, 동시에 그걸 자기자신으로 만드는 놀라운 차원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중경삼림]은 영화 전체가 뮤직비디오성 화면으로 도배되어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좀처럼 지겹지가 않다. 장편영화가 뮤직비디오처럼 화려한 화면을 구사할 수 없는덴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2시간씩 그런 화면을 보면 질려버린다는 데에 있다. 아는 사람들은 다 알지만, 뮤직비디오야말로 지겨울 경우 지겨움의 원단을 걷는 것이다. 우리나라 댄스뮤직의 그 단조로운 비트와 리듬, 거기에 덧붙여진 끝없는 노출꽝과 왕광각, 가수들의 표준적인 몸짓, 은 말할 것도 없고 그래도 괜찮은 미국의 비디오마저 리듬앤블루스의 예쁘고 진부한 화면이나 얼터랍시고 혹은 헤비랍시고 서정성이나 뽀다구를 오버하는 범작들이 쌔고 쌨다. '예쁜' 색깔일수록 계속해서 바라보면 금새 질려버리기 쉽다는 것이 정설이다. 따라서, 3분짜리 뮤직비디오마저 제대로 안 만들 경우 그 예쁜 화면으로 지겨움의 최고봉을 가기 십상인데 1시간 반씩은 가는 영화가 내내 예쁜 색깔로 도배한다면, 그 결과는 정말 끔직할 것이다. 그래서 다른 영화들은 그렇게 찍지 않는다. [나쁜 녀석들]이나 [세븐]이나 새감각의 영상을 많이 쓰고 있지만 그래도 많이 절제를 하는 편이다. 그런데 [중경삼림]은 거기에 도전했고, 아슬아슬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런데, 그 딸인 [타락천사]는 엄마의 의상을 따라입고, 본전을 들통내고 말았다.
왕가위의 [중경삼림]이 신선할 수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이것이 '참을 수 없는 뮤직비디오의 지겨움'에 도전하여 지겹지 않은, 뮤직비디오의 초상을 그려냈기 때문이다. 왕가위가 뛰어난 것은 전통적인 영상기법과 다르게 나가는 만큼, 전통적인 내러티브 방식과는 확실히 다른 절묘한 내터티브를 만들어 붙이고,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순정만화 같기도 한 감정오버 투성이의 이야기를 (난 왜 이런 유치한 얘기가 좋을 하는) 죄책감없이 즐기게 만드는 것은 그의 '깨는' 대사와 상황들이다. 즉 사랑의 미련에 빠진 주인공들의 미련함들이 유머러스한 아름다움을 얻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주) [중경삼림]의 주제는 '늦춤'이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사랑의 지연이라고 할 수 있다. 지연을 독백이라는 말로 불러도 좋을 것이다. 보통의 이야기 전개였으면 단숨에 무너졌을 그 테러적인 영상을 효과있고, 아름답게 하는 것은 분절적이면서도 전체서술을 이끌어가고 있는 독백들의 강렬한 생명력이다. 독백들은 마치 아포리즘처럼 각각이 하나의 단장들을 이루지만 여느 영화처럼 스토리 틈새에 붙어있는 일화로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곧 영화 자체, 내용을 이루고 있다는 말이다.(그러나 그 이전에 새로운 형식이다. 왕가위의 새로운 양식을 이루는 주요 진원지일 것이다.) 순간순간 파격적 영상의 지루함을 쇄신하는 것이 그 독백들의 참신성이다. 물론 두번째 이야기에서는 왕정문의 매력이 모든 것을 무마하는 강력한 재미요소가 되기도 한다. 왕정문의 사랑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관객들의 바램이 시간을 두고 조금씩 현실화로 다가갈 때, 우리는 순도 100 %의 감상적 드라마를 형성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 기다림 역시 지연의 재미에 들어감은 말할 것도 없다. 편지를 전달받기를 거부하고 나중에야 그것에 도달하는 양조위의 행위야말로 이 영화의 주제를 웅변한다. 지연. 우리는 로맨스를 좋아한다. 그리고 곧 극복할 수 있으리라 믿어지는 로맨스의 진행은 정말 즐거운 일인 것이다.
물론 이 내러티브의 성공 역시 오버의 극을 달리는 영상기법의 도움 앖이는 안 될 일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해, [중경삼림]의 성공은 내러티브와 영상이 함께 오버해서 성공한, 아주 드문 경우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아주 드문' 경우라고 하는 것은 실제로는 이런 식으로 '성공할' 작품은 이 분야에서는 딱 하나밖에 있을 수 없다는 진실을 얘기한다.
[중경삼림]은 미련스러운 사랑에 대한 얘기고, 이는 스토리나 화면이나 다 해당된다. 실연의 상처를 비누와 얘기하며 달래는 주인공만큼이나 예쁜 밤도시의 빛깔과 지구의 중력의 방향에 거스르는 사각에 집착하는 카메라는 도착증이다. 이 영화는 감상성 하나만을 자기내용으로 가진, 감상성 하나만을 자기얼굴로 가진, 전적으로 감상적인 영화다. 그리고 이 영화가 감상적인 수많은 드라마와 달리 진부하지 않은 것은 바로 그 지나친 감상성을 통해 감상성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왕가위는 '예술'이다. 앤디워홀이 예술인 것과 똑같은 이유로. 그리고 어디까지나 반反예술은 딱 한 번만 예술일 수 있듯이 왕가위의 장난 혹은 실험 역시 딱 한 번만 예술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독창성과 예술을 등치할 수는 없다. 하지만 예술 등급으로 올려주는 것과 똑같은 이유로 우리가 '참신하다' 고 평가를 내려주는 것이 사실이다. [중경삼림]은 그 감상성의 지나침으로 인해 '거리 두기'를 하며, 이것이 이 작품이 참신하게 하고, 또한 예술이 되게 한다. [중경삼림]은 뮤직비디오 세대의 자기읽기 텍스트가 될 수 있다는 거다. 아슬아슬하게, [중경삼림]은 키치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는 팝아트가 된다.
2. '망각'과 '새로움'의 차이는?
키치에 대해서 이갸기할라치면, 고뇌가 앞서게 되지만, 할수없다. '되풀이되는 유형' 혹은 펄트픽션이나 고풍스러움에 대한 야유와 애정이 요즘 잘나가는, 괜찮은 영화들의 일관된 특징이니까. 그 유명한 타란티노부터 해서 내가 좋아하는 샘레이미, ... [달콤쌉싸름한 초콜렛]나 [미나 타넨바움]도 좀 그렇고, 많은 영화들이 그런 경향을 보인다. 특히 이미지 크기나 인체분할선에 있어서 고풍스러운 샷을 즐겨만드는 요즘의 뮤직비디오의 경향 역시 이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감수성에 있어선 비슷한 메카니즘이다. 그러나 한 가지, 우리는 이 촌스러움을 찾아가는 경향이 참조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과 키치라는 물건을 구분할 필요는 있다.
키치에 대해서 널리 알려진 하나의 편견은 요건 '싸구려'라는 것이다. 그러나 키치의 정의는 필연적으로 싸구려를 함축하지는 않는다. 싸고도 양질인 상품이 널려있는 이곳에서, 싸구려라는 정의는 그다지 권장하고 싶은 정의가 아니다. 정통논의로 가자면, 키치는 기본적으로 '자기향수'에서 출발한다. (이게 바로 그 왕가위가 잘 빠지는 '자기 감상'이라는 것이다.) 이 자기향수의 단계에서 좀더 나아가면, '예측가능한 감수성'에 도달하게 되는데 이는 개개인마다 아무리 개성차이가 있어도 욕망하는 것들의 내용은 뻔하다는 판단에 기인한다. 즉 포르노 혹은 할리퀸 로맨스가 아무리 봐도 물리지 않는, 예술성보다는 말초자극으로 성공하는, 즉 진정한 키치라는 것이다. 이 예측가능성을 다른 차원으로 번역하면 '진부함'이 된다. 그리고 진부함이야말로 재미없음을 낳게 되는 일등공신이다. (그래서 나처럼 감수성이 예민한 자들은 포르노를 즐기지 않는다. 호홋...)
모더니즘 이후의 모든 예술작품들은 한 가지 부담감을 안게 되었는데, 그것은 '새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지금은 포스트모더니즘도 유행이 지나간, 즉 널리 퍼져 만연한 시절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진부함'이 작품의 미덕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우리의 논의는 최소한의 기반을 갖고 출발하는 것이다. '새로운 것이 좋다. 왜냐면 재밌으니까.'
재미가 없는 작품에 대해선 말할 필요가 없다. 그것이 예술로 불리든 쓰레기로 불리든 간에 긍정적인 가치평가를 내려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여기서 발생하는 문제는 어떤 사람들은 재미없다고 질색하는 작품들을 또 다른 사람들은 즐겁게 보고 듣고 즐긴다는 상반된 사실인데, 사람마다의 취미의 통일을 이룩할 수 없다고 해서 쉽게 논의를 포기하거나 더 열악하게는 주관적 감상과는 거리가 먼 객관적 규준을 발명해내야겠다는 주장으로 넘어갈 이유는 없다. 좀더 멀쩡한 미학적 논의가 필요하다. A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A 앞에 모이고, B를 좋아하는 사람은 B 앞에 모이고, 서로 다른 감수성과 서로 다른 미학을 갖게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의 전개이지 않은가 말이다. 지금이 무슨 왕립 아카데미가 있어 훌륭한 취미의 기준을 정해 주는 때도 아니고, 물론 반에 반 줌도 안 되는 평론가 무리들의 말에 혹해서 영화를 보는 또는 음악을 듣는 자기 기준을 잃어버리는 불행한 청소년들도 있지만, 어쨌거나 그보다야 훨씬 막강한 파워를 자랑하는 TV나 기타 대중매체가 감수성에 끼치는 영향 역시 결정적이지는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TV나 라디오, 까페나 길거리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나 영상물들이 하는 결정적인 역할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룰라를 좋아하게 만드는가에 있는 게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김건모의 스피드에 질색하게 만드는가에 있을 수 있다. 즉 거의 우리의 '환경'을 구성하는 수많은 음악과 영상물과 패션, 읽을거리들이 갖는 '대중적인 속성'이야말로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을 비롯한 수많은 '색다른', 독특하고 삼빡한 것을 원하는 사람들의 감수성의 방향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수많은 헐리우드 스타일의 영화에 질렸기에 [펄프픽션]이 재밌는 것이고, 쌈빡하기 이를데없는 CF의 예쁜 영상들이 더이상 신선하지 않기 때문에 [중경삼림]이 재미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즉 감수성은 늘 새로운 것을 찾아나서고, 감수성을 이렇게 바쁘게 만드는 것은 매순간 그를 지루하게 만드는 익숙한 환경인 것이다.
그래서 90년대의 새로움을 촉발하는 것은 실은 지나간 80년대의 답답함과 지겨움이다. 우리들이 유년시절 청소년시절 수없이 봤던 칙칙한 의상들의 반대급부로 요즘의 우리는 총천연색에 별별 재질의 첨단을 걷는 재미난 패션들과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93-95 신세대패션에 대한 지겨움이 벌써 발생하여 롱굽 대신 얕은굽, 길다란 골반바지 대신에 소위 페미닌한 짧고 고풍스러운 바지, 미니도 아니고 미디엄도 아닌 요상한 분할선의 치마들이 등장한 지도 꽤 되었다. 어쨌거나 그 희안한 분할선의 치마가 94년도에는 소통될 수 없었을 것은 분명하다. 혹시 너무나 천재적인 감각의 소유자가 그때 그런 치마를 입고 등장을 했다 하더라도, 아무도 그 분할이 새롭고 아름답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거다. 그저 '촌스럽다'로 끝날 뿐이다. '아직은' 미니스커트가 충분히 지겹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감수성은 충분히 익숙해지고, 지루해지고, 새로운 것을 개발할 시간을 필요로한다. 현재의 감수성 역시 곧 더 새로운 것을 찾아나설 것이다. (아마 좀 있으면 80년대 복고가 발생할 위험이 있지 않나 하는 것이 나의 불안인데, 제발 보수적인 분위기만은 재탕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내 바램이다.)
감수성의 순환운동은 이렇게 구성된다. 기존것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지겨움에서 새로운 것은 나타나지만, 그것이 널리 퍼지고 아주 익숙해지고 충분히 지겨워진다면, 사람들은 또 다른 새로운 것을 원하는 것이다. 그래서 복고풍이란 편리한 방법이 소용되는데, 여기에는 한 가지 인간의 능력이 필수조건으로 따른다. 바로 '망각력'이다.
어찌보면 참 쉬운 얘기다. 본 적이 없는 것이라야 새로울 것이고, 그러기 위해선 늦게 태어나거나 아니면 (어쩌면 같은 얘기겠지만) 먼 옛날의 감수성들에 대해서 잊고 있어야 한다. 그 감수성들에 대해 지겨운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면 새로운 감수성으로 되살릴 가능성이 없다고 본다. 그래서 고난의 60년대에 대해 별다른 기억이 없는 젊은이들은 복고풍 패션을 즐기고 있고, 아주 어려서 보던, 촌스럽기 그지없는 [전설의 고향]에 대해 아련한 향수만을 지니고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주 즐겁게, 샘 레이미의 [이블데드]의 테러블한 샷들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컬트를 가능하게 하는 큰 이유도 역시 공시적인 망각력에 있다고 볼 수 있는데, 문화권이 달라서 혹은 사는 세계가 달라서 새롭게 여겨지는 감각들이 있는 것이다. 장르 사이에서도 망각력은 기능한다. 락음악이 혹시 항상 새로울 수 있다면 아마 그건 팝음악이 줄기차게 진지를 고수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팝이 늘 인기가 있는 이유야 뻔하다. 매일 봐도 질리지 않는 건 포르노밖에 없는 남자들 숫자만큼이나 매일 즐거이 받아들일 수 있는 감성은 로맨틱한 무드인 여자들이 수두룩하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인신공격을 하는 것은 아니다. 굳이 어떤 감수성은 진부하고 어떤 취미는 뛰어나고 그런 구분을 할 이유는 없다. 다만 내가 지겨워하는 것에 대해서는 지겹다 고 말하는 것이다.
(주)
이 글에서 나는 줄기차게 새로움을 찾아가는 감수성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반면에 진부해도 좋다, 재밌기만 하다! 의 노선을 걷는 감수성 역시 존재하는 것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니다. TV드라마나 이지리스닝 뮤직들은 변치 않는 것으로 유명한데 이들은 너무나 짧은 망각력 주기에 의존하든가 아니면 너무나 관용적인 감수성에 의지하고 있을 것이다. 이 익숙함을 선호하는 감수성 역시 인간이란 동물에게는 새로움을 선호하는 감수성 못지않게 정당하다. 그러나 절대로 변치않는다! 는 성질이 격변하는 현재를 살고, 만드는데 얼마만큼이나 도움이 될 것인가. 이 세상에는 넓은 인생을 살게 하는 감수성이 있고 많은 인생을 살게 하는 감수성이 있고 즐거움들의 연결을 재촉하는 감수성들이 있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손해를 보는 것이고.
3. '키치'는 필요없다
'지겨운 것들' 중에 이유가 있는 것들이 있다. 시간을 때우기 위해 혹은 공부하기 싫고 일하기 싫어서 보는 소설이나 만화, 영화 같은 것들. 흔히 언론에서는 '오락물'이라고 부른다. 만드는 사람 입장에서도 "이건 정말로 재미난 '팝콘 무비'에요" 하고 선전하기도 한다. 아주 심심할 때 보면 재밌기도 하지만, 몇 개 연달아 보다보면 사실 그게그거인 이 '강력한 유형'의 작품들을 향해, 그렇다고 우리가 그걸 키치라고 부르는 게 과연 정당한 일일까?
이 물음을 던지는 이유는 '키치'라는 개념을 글로 써대는 평론가나 이론가가 있기 때문이 아니다. 어느 때고 평론가들의 말은 5 퍼센트의 가치도 없는 법이다. 이 탈많은 개념을 쉽게 버리고 넘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을 실천적으로, 작품으로써 증명하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가 없다.
사례1. [중경삼림]
[중경삼림]은 스스로를 뮤직비디오의 키치인양 내세운 최초의, 유일한 작품이다. 그러나 '지나침'을 통해서 '반성'의 효과를 가지며 스스로는 키치에서 벗어난다. 왕가위가 '이건 키치지?' 하고 의도하지 않았다 해도 이 판단은 쉽게 물릴 것이 아니다. 왜냐면, 분명히 그 예쁜 화면들은 감상에 절어있고, 지겹기 때문 - 키치스럽기 때문이다. 보는 사람은 지겨움과 신선함의 경계에서 오락가락하는 이 영화를 의식하면서 보든가 의식하지 않고서 보든가 한다. 이에 따라 이 영화는 키치에 대한 것이 되든가 키치스러운 것이 되든가 한다.
사례2. [저수지의 개들]
이 영화는 수없이 많았던 갱무비의 뒤에만 올 수 있다. 자기가 참조하는 갱무비들의 형식과 전제를 유린한다는 점에서 '키치에 대한' 증명이 될 수 있다. 자기의 참조대상에 대해 존경보다는 자조의 빛을 띈다는 점에서 그렇다.
사례3. [타락천사]
폭로 그 자체. 정말 지나치고 또 지겨운 왕광각의 연속으로 등장인물들간의 단절뿐만 아니라 인물들과 보는 사람들과의 단절 - 쟤들도 사람이야? -을 성취했다. 또한 감독의 예상을 벗어나는 희극성을 연출. 스스로 '키치에 대한' 증명은 되지 못했지만 감상성의 지나침을 예측가능하게 노출함으로써 스스로가, 왕가위의 기법이 키치임을 드러냈다.
광범위한 사례: 수많은 홍콩액션.무협물
감상주의 없이 홍콩영화가 존재할 수는 없다. 오우삼의 영화를 비롯하여 사나이끼리의 의리, 남녀간의 진솔한 사랑 등 홍콩영화의 내러티브를 가능하게 하는 덕목들은 상당히 감상적인 형식으로만 나타나며, 영화 스스로 이것을 알고 있는 듯이 보인다. '이건 키치지' 하는 자조까지는 아니지만 '물론 이건 좀 뻔한 얘기지만 그래도 ...' 하는 변명의 기색이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의식은 밑에 깔려있을 뿐 영화의 흐름을 결정하는 선까지 나오지는 않는다.
빗나간 사례: 샘 레이미의 [이블데드]
이 영화는 자기의 참조대상인 수많은 공포영화들에 대해 애정과 미움과 자조로 똘똘뭉친, 그러나 동시에 생각없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즉 '가치판단을 배제한다' 는 가치평가를 하고 있는 셈인데, 따라서 키치도 아니고 고전도 아닌 자신의 참조대상에서 매순간 벗어나는, 정말 다이나믹한 영화라고 할 만하다.
방금 들은 예들은 대개 '키치를 의식하고 있다' 는 혐의를 받을 만한 것들인데, 똑떨어지게 혐의가 증명되는 것은 없다. [중경삼림]은 아무래도 혐의가 거의 인정되는 쪽이고, [저수지의 개들]은 과연 감독이 '이건 키치야' 하고 말하면서 키득거렸다고 해서 그게 평가절하되는 건지는 의심스럽다는 것이 내 의견이다. 이 조롱이야말로 존경하는 감독에게 오마쥬를 바치는 것 이상으로 애정어린 행위로도 볼 수 있는 게 아닐까. 성룡영화나 주성치영화와 같은 코메디물은 오히려 다소 적극적으로 키치를 인식한다. '그래 난 키치야' 하는 태도로 사실주의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장면들을 남발하는데, 이쯤되면 그 용어를 과연 키치라고 붙여둘 이유가 있을까 싶은 것이다.
키치라는 말이 함유하는 '말초적이고 격이 떨어지는' 소비성 예술이라는 비난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다면 그 말을 사용하는 것을 자제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하는 것이 나의 고육책이다. 키치라는 말에서 근거없이? 달라붙은 부정적인 뜻을 제거하고 본래의 용어를 되살리려고 해봐도 '자기향수적인' 또는 '되풀이되는' 물건이라는, 얼마든지 다른 말로 대체가능한 의미만이 남기 때문이다. 물론 즐거이 '난 키치가 좋아' 라는 노선을 걸을 수도 있겠지만, 이 노선은 '지겨움'이라는 막다른 골목을 피해갈 자기기만을 늘 준비해 다녀야하는 불편함이 있다.
(주) 용어정리
'키치스러움'의 경향은 확실히 존재한다는 것이 내 판단이다. 그러나 '자기향수'의 측면과 '지겨움'의 측면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키치의 정의는 없으며, 그러한 정서로 이 개념을 남발하는 것은 안될 말이라고 본다. 이 두 가지는 다른 개념과 다른 실체를 가진 것이다. 그러나 팝콘 무비와 펄프픽션, 이지리스닝 뮤직과 댄스뮤직을 한데 엮어서 부를 용어가 꼭 필요해서 이 말이라도 써먹어야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말릴 방법이야 없다.
감수성의 순환이란 측면에서 영화와 뮤직비디오, CF 등의 영상물들을 함께 생각해 볼 때, 오늘날 우리가 발동시키고 있는 '반성'과 '참조'의 감수성들은 참으로 정상적인 절차를 밟고 있는게 아닌가 한다. 키치라는 딱지를 붙여 내치기에는 벌써부터 거물급이었던 유형들이 굳이 '고전'이란 딱지를 가질 필요는 없겠지만, 이들을 새롭게 보고, 다시 생각하게 하는 시도들에 대해서는 '바로크' 단계라는 말도 잘 어울린다. 별로 나이도 많이 먹지 않은 뮤직비디오에서 이와 같은 순환이 가장 눈에 잘 띄는데, 과거엔 멋있는 화면구성이 요즘엔 촌스럽게 보인다는 자연스러운 원리를 극복하는 사례들이 줄기차게 나오고 있는 것이다. MTV 클래식 시간을 보다보면 가끔씩 보석처럼 반짝이는 신선한 샷들이 나오는데, 이건 도무지 촌스러운 건지 유머러스한 건지 구별이 안 되는 것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제인 캠피온의 [스위티] 때만 해도 좀 낯선 것이었던 심한 사각이나 강렬한 화면분할, 광각이 요즘 영화들에는 그칠줄 모르고 등장하며 ([저수지의 개들]에서 트렁크를 여는 장면을 생각하면 된다) [퀵앤데드]나 [베이브]에서는 아예 깊은 유머의 경지에 이르는 요즘의 상황에서 이미 '멋있는' 광각에 대한 감탄과 존경과 애정은 한계선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즉, 빠방한 화면 대신 오히려 촌스러운 화면이 상쾌한 즐거움을 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늘 빠르게 달려가는 뮤직비디오는 상쾌한 광각과 함께 고풍스러운 인물배치를 붙여놓곤 한다. 이것이 촌스러운 것이 멋있는 것이 되는 유머이며, 재미난 건 덩달아 정말 촌스럽던 시절의 것마저 보는 사람에겐 유머러스하게 느껴지고, 재밌고, 멋있어지곤 한다는 것이다. 아직까지 이런 현상은 뮤직비디오에 국한된 것으로 보인다. 재작년쯤 엄청난 인기를 몰고 왔던 [포청천] 정도가 드라마 부문에선 해당될까. (광각렌즈로 대표되는 현재의 영상감각의 운동에 대해서는 나중에 글을 하나 더 올리도록 하겠다. 샘 레이미의 [퀵앤데드]와 크리스 누난의 [베이브], 노리코 사사키의 만화 [닥터 스쿠르]와 함께 테크놀로지-감각운동의 요를 꿰뚫어볼까나?)
그래서 지금 내가 한 가지 예상하고 있는 것은, 십년쯤 지나면 [중경삼림]은 사람들의 뇌리에서 도망갈 지도 모르지만, [타락천사]는 아마도 정말로 '기괴한' 영화로서, 90년대 광각의 시대정신을 대표하는 컬트로서 받아들여질 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정말 이상한 영화가 맞으니까. 물론 그 사이에는 망각의 시절이, 간극이 있어야 한다.
4. 타락의 끝은 어디인가?
타락의 끝은 키치가 아니다. 진부함이다. 키치의 반대편엔 예술이 있지도 않으며 좋은 예술이 있지도 않다. 예술작품에 있어 중요한 것은, 현재 인간들이 마주보고 있는 세계를 얼마나 깊거나 다채로운 감각으로 만지도록 하느냐, 어떠한 놀이를 가능하게 하느냐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매저키스틱한 공포놀이가 될지 새티스틱한 액션물놀이가 될지 복합적인 애정물놀이가 될지 승천하는 SF놀이가 될지는 늘 매순간 관객과 만드는 사람들의 선택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물론 재미있어야 한다. 그 중엔 아주 중요한 놀이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여러 사람의 운명을 바꾸는 작품과 같은.
[타락천사]는 실패했다는 것이 지금껏 증명을 계속해온 정당한 나의 소견이지만 그건 그리 중요한 얘기는 아닐 것이다. 왕가위는 또 다른 작품을 만들것이고, 그러고도 깨어나지 못한다면 우리에겐 (앞으로 등장할) 또 다른 감독들이 있으니까. 어쨌거나 진부함으로 인해 망했다는 것은 왕가위와 같은 뛰어난 시인에게는 치명적인 오명이 될 것이다. [타락천사], 그 극심한 왕광각의 화면 속에 붙들린 그 영화는 충분히 균형잡히지도 충분히 지나치지지도 않았고 전혀 새롭지 못했다. 똑같이 왕광각을 쓰더라도, 로드리게스의 [엘 마리아치]가 지니는 경쾌함과 신선한 충격에 비해 [타락천사]는 지나치게 예측가능한 인물들의 지나치게 잘 알려진 스토리를 구사하는, 좀 떨어지는 작품이다. 사랑에 빠졌을 때는-영화를 볼 때는 눈멀고 귀멀어 잘 생기게만 보이지만, 사랑이 지난 후에는 왜 그렇게 못 생긴 아이를 내가 좋아했었던고 일말의 후회가 들게 한달까. 이런 류의 후회가 지성인들의 입장에서 발생할 때 주로 나타나는 현상이 '나는 왜 이런 유치하고 말초적인 감상 혹은 감각에 빠졌었을까' 하는 일종의 양심의 가책이며, 이 가책을 만회하기 위해 많이들 폭력적이니 선정적이니 작품성이 떨어지네 하고 역으로 공격을 가하는게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한다. 하지만 원초적인 감성에 의거할 때는, '이제는 심심할 뿐이다' 라는 말로 충분하다고 본다. '이제는 그를 잊었다' 란 말로 충분하듯이.
(내가 알기론 현실에서 일어나는 가장 가슴저리고 강렬하고 진실한 사랑의 전개는, '통속소설'과 너무나도 닮았다. 하지만 우리는 늘 다른 삶을 살고 싶어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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