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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마 텔레토비 왜 이렇게 재미있는 것일까? 1999.03

내가 처음으로 티비 화면에 등장한 빨갛고 노랗고 연두 보라인 이 토실토실한 엉덩이와 막강 배때기의 어린아인지, 외계인인지를 보았을 때 받은 쇼크는 엄청
났다. 거의 쇼파에서 구르다 파닥거리며 바닥에 떨어졌다. 여타의 어린이 프로그램과는 비교 자체를 거부하는, 어린이 프로의 컬트! 전부터 듣기로 어린이의 엑스
파일이라길래 그래도 설마 했더니만, 나 또한 다른 매니아 어린이들처럼 비디오에 녹화해서 보고 또 보고 싶은 욕망을 참기 힘들었다. 눈감으면 나나의 살랑살
랑하는 손동작이 아른거리고, 친구와 헤어질 땐 손을 들어 안냥~하고, 시도 때도 없이 동생과 함께 보라돌이~ 뚜비~ 나나~ 뽀오~를 생활화하기에 이르자, 텔레토
비는 도대체 왜 이렇게 재밌는건지, 난 곰곰히 면밀히 생각해보게 되었다.
우선, 누구나 쉽게 동의할 수 있는 특징. 귀엽다~. *^^* 그 토실토실한 엉덩이와 빵빵한 배때기, 아기같으면서도 외계인스러운 얼굴과 머리에 달린 제각각의 안테
나, 파란 잔디에 선명하게 대비되는 예쁜 색깔들, 그리고 느릿느릿하면서도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몸동작과 평균 열 단어를 넘지 않는 절제된 그러나 풍부한 뉘앙
스의 대사, 정말이지 너무너무 귀엽다.
그 다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느릿느릿하다는 것, 그리고 반복적이라는 것이다. 이를 두고 단순히 유아 및 미취학 아동들을 위한 프로그램이니까, 하고 쉽게 넘
어간다면 다 큰 어른들도 껌벅 넘어가버리는 컬트 텔레토비의 비밀을 알 수 없게 된다. 텔레토비가 컬트가 된 이유가 바로 이 느림과 반복성에 있기 때문이다. 느
릿느릿한 동작과 느릿느릿한 커뮤니케이션은 '정보환원주의'를 공격한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느끼는 쾌감의 원천이 된다.
>>>>>>정보화론에 대한 막강 반격!
무슨 말이냐면, 현재 사회 각분야를 뒤흔드는 정보화론의 추세는 한 가지 편향성을 갖는데, 인간사의 모든 문제들을 정보의 문제로 환원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뚜비의 모자가 크던지 작던지, 정보론은 이에 대해 두 개의 정보만을 인정할 뿐이다. 그러나 우리의 텔레토비는 뚜비의 모자가 작아지고, 여기에 뚜비가 반응하
고, 보라돌이가 와서 반응하고, 재밌어하고, 카메라 바로 앞에까지 와서 텔레토비 친구들에게 '작아졌네~' 하면서 즐거움을 나누고, 다시 나나가 나타나서 반복하고,
뽀가 나타나서 그 과정을 다 반복한다. 정보론의 견지에서 보자면 몹시도 경제성이 없는 정보소통이라고 할것이다. 그러나, 뚜비의 모자에 대한 보라돌이의 느낌
만큼이나 나나의 느낌도 중요하다. 그렇기에 생략이란 있을 수 없다. 정보화론으론 이해할 수 없는 '행위 자체의 즐거움'이란 것이다.
>>>>>>텔레토비의 쾌락학 - 행위 자체의 즐거움!
나름의 쾌락학을 텔테토비는 갖고 있다. 인사하는 데만 5분씩 걸리는 멀미날 정도의 즐거움은 자체의 정교한 양식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반복은, (그 일부
만이라도) 프로그램 시간을 늘려보겠다는 얕은 수작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분명한 스타일이 되어있다. 반복은, 쾌락을 증대시키는 필수적인 요건이다. 느릿느릿
함도 그렇다. 보다 효율적이고 빠른 정보소통만을 최고라고 여기는 현재 사회의 공론에 대해, 전혀 엉뚱한 방법이 실제로 즐거움을 준다는 것 자체가 또한 즐거
움이 되기에, 어른들은 어린이보다 더 '많은'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크기나 순도는 좀 뒤지겠지만)
느림은 특히나, 시간에 대한 다른 감수성을 만든다. 보는 이는 최면에 빠질 듯한 느린 동작들 속에서 다른 시간의 흐름을 타며, 이 느낌을 간직한다. '텔레토비 효
과'의 하나라고 할수 있다. 이 시간만큼은 지금 (탈)산업화 사회의 베이스로 깔려있는 계량적 시간을 차단한다. 마치 무릉도원의 현대어린이판과도 같은 파란 잔
디밭에 첨단 테크놀로지가 결합된 이 세계는 확실한 존재감을 가지고 다가오며, 이것들이 결합하여 만들어내는 몽환적 분위기 속에서,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아
마도 영국 사회주의의 영향이 아닐까 의심되는 이 분위기를 북돋아주는 것은 '가족'이 없는, 다만 모양새와 나이 등이 조금씩 다를 뿐인 '친구들'의 공동체의 모습
이다. 노동도 없지만, 성적 역할 분담도 없고 위계질서도 책임같은 것도 없다. 가까이는 녹색운동의 영향이라고 봐도 좋을것 같은데, 자연을 큰 가치로 내세우면
서도 과학과 사이좋게 결합한 것으로서 미래의 이상향을 제기한다는 점에서 이 프로그램을 보고 자라나는 어린이들의 장래에 미칠 '효과'가 크지 않을까 생각된
다.
>>>>>>이분법의 음모를 파헤쳐라!
텔레토비의 쾌락학은 정보론에 대한 도전이자, 궁극적으로는 언어학에 대한 공격이다. 텔레토비는 지배 언어의 권력을 자연적인 것처럼 위장하려고 하는 언어
학, 인문사회학, 정보론 일반의 음모를 폭로한다. '행위 자체의 즐거움'이란 별것 아닌 일에도 재밌고 고소한 것이다. 그래서 보는 우리는 저 행동이 무엇을 의미
하는지 고민할 필요가 없다. 바로 그 행위 자체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언어학은 개입할 수 없다. 현대 인문사회학을 완전히 물들인 구조주의 언어학의 이분법과
는 전혀 다른 논리로서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며, 따라서 이에 대한 완벽한 반박이 된다. 한마디로 텔레토비는, '기표와 기의의 차이가 없다'. (똘똘한 우리 동생,
고맙구나! ^^;)
좀더 쉽게 말하자면 '그런거 없다' 가 될 것이다. 즐거움은 즐거움이다. 거기엔 다른 것이, 즉 의미가 없다. 의미가 없기에 언어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우리가
아는 한 소쉬르 할아버지는 기표(시니피앙)와 기의(시니피에)는 자의적으로 결합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후의 언어학과 그 영향을 받은 구조주의자들은 이 자의성을 신앙처럼 받들며 기표와 기의의 차이와 결합의 신비를 탐구하는 것으로서 우
리의 사유를 제한했다. * 그러나, 기표와 기의는 실제로 자의적으로 결합하는 것이 아니라 사법적 효력과 의무교육의 강제 아래 비끌어져매지는 것이다. 구조주
의는 이것을 자연적인 것으로 위장하며 허깨비 차이로써 실제의 에너지의 충돌과 생산이 벌어지는 현장의 차이들을 은폐한다.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은 기호의 질
서가 아니라 욕망들이라는 사실을 가리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구조주의는 현재 가까스로 유지되고 있는 질서가 아닌 다른 질서를 만들어낼 가능성을 두뇌로부터
차단하는 기능을 한다.
* 그리고 최근엔 보드리야르를 필두로 하여 '시뮬라크르의 지배 속에 사라지는 인간의 주체성'이라는 비관적인 전망을 유포하는 데 이르러 포스트모더니즘 전반
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키며 해를 끼치고 있다. 인간은 떠다니는 기표 속에 갇혀서 오로지 조작된 욕망에 이끌려 움직이는 좀비가 될것이라는 이 비관적 주장
은 단지 비관적이고, 비판적이라는 이유만으로도 맞는 말처럼 들려서 인기가 있긴 하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현실계와 사이버계의 구분이 없어지고, 개인의 자
아가 흔들리는 데에 있는 게 아니라 그 탈영토화의 과정들에서 우리의 욕망들은 새로운 영토-사이버스페이스 등등-를 개척하고도 구래의 관습에 묶여 무겁고 남
루한 옷 속에 그 빛나는 잠재성들을 그저 잠재우고 마는 데 있는 것이다. *
그 영향은 단순히 지식인들의 말잔치에서 끝나지 않는다. 우리들 모두가 가지고 있는 불문율, 그것은 생계를 걱정하며 살아가는 세상에서는 언제나 하지말아야
할 것과 해야할 것만이 있고 그것을 지키면서 다른 한편, 정해진 오락의 시간에만 감정과 꿈들을 표현할 수 있다는 규칙이다. 그것은 '원래 그런것'이라고 배워
들은, 막강한 인간사회의 이분법의 규칙이다. 그것은 마치 기표와 기의처럼 짝을 이루어 의미를 만들어낸다. 이에 따라 생 자체는 재미없고 의미있는(오락을 가능
하게 해주니까) 노동일 뿐이게 된다.
그러나, 생은 재밌어야 한다. 그리고 노동과 쾌락의 분리만이 올바른 길이라고 주장하는 편집증에 우리가 꼭 따라야할 이유가 있나? 텔레토비처럼 단
순한 기쁨에 몰입하고, 즐겁게 살아도 좋은 것이다. 텔레토비의 쾌락학이 갖는 막강함은 우리가 의심없이 받아들이는 전제들을 뒤집어버릴 수밖에 없는 양식
(style)을 우리의 의식 수준에 띄워주고, 그것을 웃음으로 기억시킨다는 데에 있다. 아마도, '텔레토비 효과'는 지금 젊은 세대와 다음의 세대들에게 나타나 욕망
을 부끄러운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삶의 원동력으로 인정하며 이중적 윤리 같은 거 없이도 잘 살아나가는 경향이 두드러질거라고 생각한다.
텔레토비가 언어학에 대한 공격이라는 나의 주장에 대해, 이따금씩 숫자를 가르쳐준다거나 반복적인 대사로 말을 가르쳐주는 것을 이유로 반론을 편다든가, 타
협 혹은 배신이라고 방방 뛴다거나 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무인도에 가서 살 게 아닌 이상, 기본적으로 사회적인 소통을 위해 배워야만 하는 기호체계를 아예
거부한다면 아무것도 할수 없을테니까, 그것을 익히면서도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살아나갈 수 있는 감각을 키워준다는 것은 아주 적절한 대처방법이라고 할수
있을것이다.
또 하나. 진작에 주류문화에 대항하는 많은 만화와 영화, 문화상품들이 있었다. 이들을 쉽사리 제끼고 컬트가 된 텔레토비의 특이점은 아마도 상징이 없다는 데
에 있을 것이다. 언어학을 완패시킨 것과 같은 이유지만, 완벽한 행위와, 그것의 즐거움이 있을 뿐이지 수많은 환타지나 게임에서 볼수 있는 설정들, 상징들이 없
다. 그것은 권력에 저항하기 위해 다른 언어, 질서를 설정하려드는 시도가 봉착하곤 하는 '또다른 억압'의 위험과 애시당초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텔레토비에 대한 얘기는 무궁무진할 수 있다. '토실한 것이 아름답다!' 를 구호로 하는 새로운 미감이 등장하는 것에 대해서도 한보따리 얘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현대의 '슬림한 것이 아름답다' 주의를 정면공격하고 있으니까. '텔레토비 극장 시간'에서 자주 보여주는 자연친화주의와 정중동(靜中動)의 미학
은 노장사상의 영향이라고도 볼 수 있다. 스타일이나 사상면에서 [보노보노]와 통하는 점을 생각해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것을 파고들어가더라도, 어떤 해석
을 우리가 부여하더라도, 텔레토비는 무엇보다도 그 스피릿이라고 할만한 것이 매력적인 주인공들의 몸짓으로 체화되어 있기에 팬들로부터 받는 사랑은 하늘 아
래 한점 사기성이 없다.
해석이라는 것이 '어떤 것은 항상 그 자체와는 다른 것을 의미해야 한다'(펠릭스 가타리)는 문화적 강박관념의 버릇이라고는 하지만, 지금까지 풀어본 나의 해석은
진정한 자극으로서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뛰어난 문화상품이 당연 받아야할 대접을 해주기 위한 최소한의 설명이었다고 본다. 우리는 우리가 믿는 것, 좋아하는
것, 느끼는 것, 재밌다고 여기는 것들을 좀더 존중하는 연습을 할 필요가 있다. 언제나 전문가의 말이나, 제도학문의 앞에선 겸손으로 일관하는 태도를 버리고
감각의 연장으로서 생각을 하는 버릇을 증진시키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물론 교육적 성과는 텔레토비를 직접 보는 거랑은 비교가 안 되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심화학습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
우리의 귀엽고도 골때리는 텔레토비들은 오늘도 반복을 계속한다. 그리고 반복은 가끔씩 변이를 만들어내어 우리를 더 즐겁게 한다. 반복학습의 효과는 놀랍다
던데, 저녁이면 어른들은 늘 다른듯 하지만 언제나 비슷한 이야기를 되풀이하는 연속극을 보고 또 보고, 아침이면 아이들은 맨날 똑같은 걸 반복하지만 뭔가가
달라서, 웃음 속에 멈춰지는 텔레토비를 본다. 반복은 힘을 갖는데, 그것은 자체로 삶이 된다는 것이다.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간에. 그것은 DNA 복제 이
후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우리를 계속 나아가게 하는 힘이다.
그럼 여러분 안녕~ *^^*
바이바이~
까궁~ ^^
반복은 차이의 시작입니다. 여기서 반복은 어떤 것의 종말, 과정의 멈춤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탈영토화의 문턱, 욕망하는 변이의 기호를 표시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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