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사회기계에 대한 분노 rage against the machine
back to noculture
내일 2000년 6월 21일 서울 올림픽 체조경기장에서 드디어 rage against the machine이 한국 공연을 하게 되었다. rage against the machine은 92년 1집을 낸 미국밴드로 사운드로나 가사내용으로나 조금도 손색없는 '공격적인 사회비판'을 해내는 음악가들이다. 랩과 메틀을 접목했다는 말만 하면 한국인의 뇌리에 떠오르는 건 서태지일지 몰라도, 락의 왕국인 미국에서는 그전부터 그런 시도들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rage against the machine은 사운드의 공격성 못지 않은 빠방한 사상적 뒷받침에다가 사람 놀래키는 독창적인 기타 사운드로 이름을 떨치면서, '하드코어'라고 우리가 부르는 흐름을 거하게 일으키는 중추적인 역할까지 하게 되었다.
이 '하드코어' hardcore라는 용어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는데, korn이나 rage against the machine, madcapsul market 등등을 한국에서 말하는 '하드코어'라는 장르는 정확히 말하자면 핌프락 pimprock이라고 부르는 게 올바른 용법이라고 한다. 나도 전에 듣기에, nirvanar가 그런지 열풍을 일으키기 전에도 미국땅에서 펑크의 정신을 면면히 이어가던 한 경향을 가리켜서 하드코어라고 부른다고 했었다. 그 하드코어는 3분을 넘지 않는 펑크보다 한술 더 떠서 절대 2분을 넘지 않는, 어떤 땐 30초를 넘지 않는, 아주 강력한 사운드와 공격성으로 뭉친 무서운 펑크를 말했다. 그뒤 언제부턴가 korn과 rage against the machine를 하드코어라고 부르고 있었다. 정신의 계승에 있어서는 하드코어라는 말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닌듯 싶다. 용어는 바른말을 쓰는게 좋겠지만, 핌프락이라는 말은 괜히 설어서,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등장시키지 않으려 한다.
rage against the machine의 음악은 한 마디로 만만치 않다. 대개 음악애호가인 팬들은 그 기타 안 같은 기기묘묘 기타 사운드에 뻑가고 마는데, 음악을 하는 창작자의 입장인 팬들이 그못지 않게 감탄하는 것은 못지 않게 독창적인 드럼이다. 락이 원래 강렬한 비트가 매력인 장르니까, 드럼이 실제로 가장 중요한 요소인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rage against the machine의 드럼은 상당히 다이나믹하면서도 맛깔스럽다고나 할까? 약간은 구수한 듯한, 옛스러운 사운드에 착 들어맞는것이, 다른 요즘 밴드들에선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함이 있다. 물론 베이스도 장난 아니다. 전체적으로 각 파트 모두가 장난 아닌 독특함과 개성이 있어서, 언어로는 무슨 사회비판을 떠들던간에 음악적으로 먼저 치고들어오는 감흥이 먼저라고
생각된다.
이 밴드는 재미나게도 1집 앨범의 속지를 보면 자기네를 이해하기 위해 참고서적이 될만한 것들을 좍 늘어놓았고, 그중에도 체 게바라의 책이 눈에 띈다. 공연중에 체 게바라 얼굴이 그려진 티셔츠도 심심찮게 입는 바람에, 국내에 체 게바라 열풍을 일으켰다는 사실은 참 재밌다. 체 게바라 하면 옛날 대학가에 사회과학, 사회주의 바람 불던 시절에나 유행했어야 할듯한데, 엉뚱하게도 모든 거대 이성주의를 거부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을 생득관념으로 하는듯한 신세대들에게서 유행하고 있으니, 음악의 위력은 정말 놀랍다. 이 현상을 두고 386세대 아저씨들은 생각없이 오로지 감각적으로 모든걸 받아들이고 소비하는 신세대들의 행태에 우려를 금할 수 없어하는것 같은데, 내가 보기엔 좋은걸 좋다고 즐기는것은, 또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관련된 것이라면 일단 감정적으로 받아들이고 보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고
충분히 득이 될 수 있는게 아닌가 한다. 개중 몇명이라도 진지하게 자본주의 기계의 폭력과 그에 대처하는 사회적 방법들을 고민하게 된다면, 좋은 일이지 않을까.
rage against the machine, 기계에 대한 분노. 내가 처음 이 밴드의 이름을 듣고 헷갈렸던 것은, 이 기계반대라고 하는 것이 혹시 산업화에 대한 반발, 러다이트 운동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었다. 이 밴드가 주장하는 바를 전해듣고 나서야, 다행이군, 자본주의 사회기계에 대해 분노, 저항하는 놈들이구나,(...분들이구나 ^^;) 하고 안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사회기계, 자본주의 기계라는 개념을 가진다는 것은 이 인간들이 이미 들뢰즈와 가타리의 수준에 다달았단 얘기가 된다. 오옷! 이럴루가!
들뢰즈와 가타리가 72년 [앙띠오이디푸스]에서 제시한 새로운 사상의 지평은 의지나 정신 등속으로 잘려나가지 않는 '육체'를, 자기의 합리성을 갖는 완벽한 기계로서 보여준 것이라고 난 본다. 이것은 사실 그리 어려운 얘기는 아니다. 서양인들을 위한 설명이기에 동양인인 우리로선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 몇번 왔다갔다 해야하지만 실은 노자老子 사상의 '기氣'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동양사상의 氣는 서양사상의 물질과 다르다. 서양사상의 근본전통은 물질과 정신, 현상과 본질, 이데아의 절대적 이분법에 있다. 그래서 만약 자본주의 문제를 얘기한다 하면 거대한 구조로서의 자본주의에, 여기에 개개인으로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인간이 등장하고, 어쩔 수 없이 상품경제의 법칙에 따라 일하고, 욕망하고, 소비할 수밖에 없다는 한편의 시나리오가 성립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본'이 주인인 줄 알았던 사회를 움직이는 근본적 실체는 '욕망'이라고 하는 육체라는 얘기다. 욕망은 개인의 의지와 기타등등을 벗어나 있는, 들뢰즈와 가타리가 파악하는 바의 인간사회의 실체이다. 인간을 욕망하는 기계라고 부르는 것은 '육체의 욕망에 정신이 종속된 불쌍한 꼴'을 얘기하는 게 아니라, 몸에서 구분된 마음이라는 것이 허구임을 인정한 상태에서 인간에 대한 고찰을 행한 결과인 것이다. 즉, 들뢰즈와 가타리는 몹시 현학적인 투로이긴 하지만 서양사상의 이분법에서 벗어나는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봐야한다.
그래서 자본주의 기계는 욕망하는 기계에 얹혀사는, 호랑이 등에 붙은 귀신이 된다. 달리는 것은 호랑이지만, 겁을 줌으로써 교란을 꾀하는 것은 귀신이다. (귀신은 그냥 귀신은 아니고 이 이야기가 나온 전설에 따르면 무슨 작은 동물이었는데, 뭐였는진 그만 까먹었다. -.-;;)
자본주의 기계, 국가 기계, 제국주의 기계 등과 같이 어떤 사회적 실체를 가리키는 말 뒤에 '-기계'라는 접미사를 추가하는 모든 용법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일으킨 사상적 전환과의 연관성을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rage against the machine 역시 어느 정도는 위의 이야기와 상통해야 되지 않을까 하는데, 깊이 연구해보지 않아서 확인은 못 해봤다. '기계'의 이미지를 쓰는 법을 봐서는 확실히 그쪽 편에 서는데, 아무리 미국밴드지라만 미제국주의 비판 일색으로 가는 모양을 봐서는 좀 아닌듯도 하다. 1집 앨범 자켓에 우리 사운드는 일체 미디나 샘플링 따위에 의존 안 하고 만들었음 하고 써놓은 것을 보면 상당히 아날로그적인게, 그 machine이라는 것이 사회기계뿐만이 아니라 기계문명도 겨냥한 것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사회기계만을 기계라 부르고, 스스로가 기계임에 대해서는 아무 말 없는 것을 보면 내가 섣부른 기대를 한 것인지도 모른다. 전체적인 사운드 자체도 고풍스러운 데가 있는게 사실이다. 그 구수함?이 잭 들라로차의 멋진 랩과 함께 어떤 그루브감을 형성한다.
산업화 초창기에 노동자들이 기계를 때려부수던 러다이트운동과 비슷한 것이 요즘 사회에 있다면 아마도 컴퓨터 네트워크를 무시하고서 '예전처럼' 살고싶어하는
사람들의 보수주의가 될 것이다. 물론 '정서적인 만족감과 공동체의 유대'를 지키고 싶어하는 것이 꼭 기술발전에 대한 반대가 되어야 하는냐, 기술문명의 재구성
을 통해 잘 살아볼 생각은 왜 안 하는 반박에서는 피할 수 없다. 어느쪽에 초점을 맞추느냐의 문제로 전락하는 감은 있지만, '기계에 대한 분노' 자체로서는 어떤 공
통점을 갖는 것이 사실이다.
rage against the machine이 홍대 근처 락까페들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것은 대략 96년에서 97년 정도의 일인거 같다. 한참 좋았던 락까페들이 후즐근해질 무
렵엔 rage against the machine을 거의 패러디랄까, 실은 심하게 모방한 김종서의 추락천사가 나와서 기분을 잡치게 하곤했다. 나중에 HOT의 'killing in the name'의 변주곡이 아닐까 싶은 '열맞춰'가 나왔을 땐, 누구는 'killing in the name'에 맞
춰서 '열맞춰' 부르고, 또 누구는 '열맞춰' 나올 때 'killing in the name' 부르고 했다는 엽기적인? 일화도 들었지만, 그땐 이미 난 락까페들과 친하지 않았기에 확인
은 할 수 없다. 아마도 그냥 믿어야지 별수없는 거 같다.
rage against the machine의 음악이 표출하는 공격성이라는 거, 또는 그 영향을 받은 많은 밴드들, 심지어는 댄스그룹까지 흉내내는 공격성이라는 것을 우리는 엄
연히 따져보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솔직한 얘기로, 한국의 펑크나 하드코어(핌프락)의 유행과 열광 밑에 깔린 것은 '분출하는 반항기를, 특히나 성적 충동을
억제할 수 없는' 사춘기 청소년들의, 특히 남성들의 욕망이라고 본다. 어느 유행음악이 성과 상관 없으리련만, 현재까지 지구촌의 관습은 락을 통해 가장 강렬한 공
격성이 표출되며, 그것은 rage against the machine처럼 막강한 사상적 배경을 갖춘 제대로 하는 비판이 되었든 한국의 댄스그룹들이 뽕짝정서(멜로디)에 반항기
(랩, 슬래쉬사운드) 좀 섞어서 억압환경에서 고통받는 청소년들의 가려운 곳을 좀 긁어주며 돈이나 벌어보세 하는 사이비가 되었든지 간에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다.
요즘엔 그동안 유행하던 랩이니 힙합은 다 엉터리고 여기 미국 본토 흑인들의 필과 저항정신을 그대로 지닌 힙합 전사들이 있다! 하고 나서서 인기끄는 그룹들이
있는데, 팔아먹으려고 한 말이라면 모를까 그걸 그대로 믿는다면 그보다 더한 바보가 없다고 생각한다. 먼저, 그 뽕짝성과의 결합으로써 한국인의 정서에 다가가기
위한 기본적인 변형을 거치는 판인데, 본토박이 발음 하나로 곧 본토의 저항성이라고 우길 수 있는가 하는 점. 뽕짝의 정서는 기본적으로 패배주의이기 때문이다.
강탈과 패배로 점철된 역사를 가졌다고 곧 패배주의가 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흑인음악의 정서 역시 기본적으로 패배의 역사를 반영한다고도 주장할 수 있겠지만,
그 은근과 끈기, 저항의 필은 한국인이 최근세 역사에서 일본에서 배워온 엔카를 계승한 뽕짝의 정서와는 상당히 다른 것이다. 한민족 음악의 정서는 본래 恨을 기
조로 한다고 보면 패배주의와의 상관성을 얘기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일제시대가 아니고, 그만큼 패배주의에 쩔을 정당한 이유는 하나도 없다. 그리고, 한민족의 정
서가 한편으로는 '흥'에 있음을 생각해볼 때, 흑인음악의 정서가 한국인에게 (음악적으로) 번역될 때, 반드시 뽕짝이 되어야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체념이나 패배주의 말고도 흥과 신바람, 지칠 줄 모르는 오기, 등등의 적합하고 바람직한 정서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본토 직수입'이란, 미국사회 안에서 그 나라 사람의 정서로 창작하고 활동하는 아티스트의 결과물을 받아보는 것을 넘어서서는 의미가 없는 말이다. 한국
에서 한국 사람을 대상으로 '만든' 음악이란 어디까지나 락이건 팝이건 힙합이건 간에 한국 사람의 정서에 맞게 창조된 음악일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전에 락에 대해서 일부 사회과학을 공부한 평자들이 유치찬란한 락=젊음=저항정신의 도그마를 휘날렸듯이 지금은 흑인 음악이란 것에 대해서 랩=저
항, 힙합=저항 식으로 도그마를 강요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점에 대해서도, 의문을 던져봐야 할 것이다. 저항은 무조건 좋은 것인가? 공격성은 무조건 훌륭한 것인
가? 어디까지나, 이유가 있길래 저항을 하고 이유가 있길래 공격적이 되는 것이다. 인간의 구조가 사춘기에 이것들을 가장 쉽게 하기 때문에 '맹목적'이라는 표현에
하자가 없을 지경으로 사춘기 젊은이들은 그 정서를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우뇌가 우세해서 감상적이고 기분에 따라서 뭐든지 '그냥' 실행하는 신세대라
고 하더라도 자기가 살고있는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가, 자신은 어떤 원리와 동인에 따라서 움직이며 괴롭고 즐겁고 슬프고 기쁘고, 행복할 수 있는가에 대해 아무런 생각도 없이 산다면 아주 가까운 패배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인간에게
좌우뇌가 다 달린 것은 그것들을 적절히 써먹기 위해서이다. 양쪽 뇌를 다 써서, 예술이나 생활양식, 사회적 관계들을 적절히 잘 운용하는 것이 더 똑똑한 짓일 것
이다. 공격성을 그저 공격성으로만 버려두고 그 방향이 술먹고 걷어차는 깡통으로나 향하는 것보다야 자본주의의 치사한 법칙들이 과연 보편타당한 것인지를 의심, 비판하는 것이 휠씬 지구에 보탬이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rage against the
machine의 똑부러지는 지성과 독창성은 아주 고무적이다. 모범적이라고나 할까.
내가 정말로 좋아했고, 일종의 충격으로 받아들였던 1집에 반해, 2집과 3집은 이미 다 알고 있는 것들이라 더이상 놀랄게 없는, 그냥 그랬던 느낌이었다. 처음 접
할 때의 강렬하고도 생소한 즐거움을 바란다면, 앞으로도 그와 같은 즐거움을 다시 이 밴드에게서 누리기란 아마도 힘들지도 모른다. 이미 형성된 개성이 변화하
는 건 그럴만한 이유들을 가져야 하니까. 그래도, 욕심을 조금 덜 부린다면, 그나마 미국에서 제일 똑똑한 밴드의 멋진 음악을 서울에서 직접 접할 수 있다는데에
조금 흥분하면서 즐거이, 공연을 보러갈 수 있을 것이다. 남들과 달라서 좋아하기도 하지만, 세월이 가도 변치 않아 좋아할 수도 있다. 이번 rage against the
machine의 공연을 갔다오면 나의 선호메카니즘도 혹시 달라질지 모르겠다.
2000.6.20
back to nocul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