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여자과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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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니까
티비광고를 접하다보면 많이 접하게 되는 말이 있다. '여자니까', 혹은 '여자니까요'. 여자니까, 공주의 특권을 누릴 수도 있고, 여자니까, 부드럽고 편안하며 모든걸 감싸줄 수 있는 만능위안기계
가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아직까지 '여성이니까'라는 말은 등장을 하지 못했다. '여성스러운'이라는 말은 패션이 관련된 미디어에서는 제법 쓰이고 있지만 말이다.
이건 아직 '여성'이라는 말이 문어체에서 많이는 벗어나지 못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여자들은 아마도 '여자'라는 말로써 자신을 실존적으로 고려할 뿐, '여성'이라는 말은 단지 추상적인 '여성일
반'이라는 존재를 나타내는 단어인양 느끼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일상적인 대화에서는 '여자라고 차별하냐?'하고 열불을 내지만 띠두르고 데모를 할 때는 '여성차별 철폐하라!'라고 외치는 식이
란 말이다.
얼마전 왠 한나라당 의원이 여성이니까 법전과 행정기구 명칭을 모두 '여성'으로 통일하자고 했다던데 그 이유가 엄청나다.“여성은‘생물학적이고 정태적인 존재(sex)가 아니라 '사회적 존재
(gender)이며 진취적이고 평등한 인간상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자는 생물학적이며 정태적인 존재인가? 그건 아닐 것이다. 여성이야말로 추상적이고 따라서 동시에 생물학적이
며 사회적인 존재, 그렇기에 아직 오지 않은 꿈을 투사할 수 있는, 허상의 존재일 수 있다. 그러나 여자는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여자와 여성은 또 하나의 이름, '여인'을 갖고 있다. 그러나 여자와 여성은 자기네와 짝을 지을 수 있는 남자와 남성이라는 말이 있지만 여인은 짝을 지을 말이 없다. '남인'? 정말 우습다. 당파
싸움할 때 남인南人 서인西人 하던 것도 아니고. 그러나, 여인 역시 그저 여자란 말을 그냥 대체할 수는 없는, 나름의 의미의 자락을 지닌다. 여인은 다 큰 여자, 성숙한 여자에 대해서만 쓸 수
있는 말이다. 그리고 여성보다도 훨씬 더 신비화를 행하는 말로써, 소설이나 시, 혹은 폼을 좀 잡는 글에나 등장할 수 있지, 일상적인 대화에 등장하기에는 어려운 말이다. 마치 '그녀'라는 말이
누군가의 성대를 울리며 발음되는 일이 일어나는 일은 오로지 티비나 라디오에서나 가끔씩 좀 어색하게 벌어지는 것과 비슷하다.
요즘엔 여인이라는 말을 듣기가 어렵다. 티비광고만 봐도 '여자니까'라는 말을 쓰지 '여인을 위한'이라든가 '여심' 같은 말도 듣기 어려워졌다. 그건 아무래도, 여인이라는 말에 철썩같이 달라붙
어 있는 '성숙한 여자'의 이미지를 이용해서는 상품을 잘 팔아먹기가 힘들다는 아주 실질적인 이유에서 시작된 일일 것이다. 요즘 사회는 갈수록 점점 성숙한 여자 대신 미성숙한, 덜 자란 여자
들이 가장 빼어난 미인으로 추앙받으며 그 드높은 성적 매력을 인정받는 추세다. 그래서 뭐든지 하나가 잡으면 싹쓸이를 하기로 악명 높은 한국에서는 지금 티비에서 볼 수 있는 젊은 여자의 얼
굴이라곤 대략 두 가지 변종 정도만 있을 뿐, 순'어린애 같은 얼굴'판이다. 여자들이 모두 '어려보이기' 위해 발악하는 때 성숙한 여인의 이미지를 팔아먹으려 하다가는 틀림없이 망할 것이다.
여배우들만 봐도, 아름다운 여인이라는 말이 어울린다고 할 만한 배우들은 그레타 가르보라든가 잉그리트 버그만이라든가, 모두 옛날 배우뿐이다. 한참 뜨고있는 나이어린 배우들한테야 당연 아니라 해도, 이를테면 샤론 스톤 같은 여자한테도 여인이라는 말은 왠지 안 어울린다. 맥라이언만
이 어디까지나 귀여운 여인으로서 자리를 굳혔다. 나이먹으면 (시어머니 노릇을 위한 탤런트 자리 빼곤) 남아있는 여배우가 없는 한국에서는 영화 [정사]에서 아름다운 중년의 자태를 뽐낸 이미
숙 말고는 '여인' 칭호를 붙여줄 만한 사람이 잘 안 보이는 듯하다.
여자가 되고 싶었어요
몇년전 한 아름다운 여자가 예쁘게 화장을 하고서 카메라 앞에 다소곳하게 고개를 약간 떨군 자태로 나와 이런 고백을 했다. 모두를 뒤집어지게 했던 것은 이 여자가 주민증 번호가 1로 시작하
는, 법적으로는 남자에 속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렇게도 여자가 되고 싶어서 성전환 수술까지 받은 이 성전환자는 '여성이 되고 싶었어요'라고는 절대 말하지 않았다.
사실, 성전환자들에 대해서는 아직도 이 여자가 여성이다 남성이다 말을 시작하면 쉽게 의견일치를 보지 못할 것이다. 남성의 성기가 달려있어서 여성이 아니다부터 해서 수술을 받아도 역시
염색체가 XY라서 여성이 아니다 등, 아마도 앞으로 의학이 발달해서 남자가 애를 낳을 수 있게 되어도 이 논쟁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 사람이 여자냐 아니냐를 묻는다면 난 그것만큼은 별고민 없이 대답할 수 있을 거 같다. 여자다. 저 아름답게 여성스럽게 차려입고서 남자의 시선이나, 열정이나 욕망이나 사랑
을 기대하고 있는 저 여자를 여자라고 하지 않으면 누가 여자겠느냐 하는 것이다.
'여자는 여자다'. 고다르 감독의 영화제목이다. 이건 절대 '여성은 여성이다'로 번역될 수 없었을 것이다. 여자라고 하는 말에는 여성이라고 하는 생물학적인 존재로 태어나 자신에게 주어지는 사
회적 조건에 대응해 성장해 나가는, 더 나아가서는 몇만년 이상을 여자로 사는데 적응하여 얻어진 본능까지를 발달시킨 노련한 존재의 향기가 강하게 묻어있다. 이건 솔직히 말해 상당히 무시무시한 용어다. 여자는 육감이 발달했으며,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 여성
에 대해서는 그런 말이 없다. 단지 여성은 남성지배 체제에서 착취받는 입장일 수도 있고, 현대의 산업사회에서 새로이 전처럼 불리하지는 않은 자기의 지위를 차지할 수 있는 능력자일 수는 있
다.
여성적인, 여성스러운
'여성적'이라는 말을 통해서야 여성이라는 말은 구제가 되는 듯하다. '페미닌' 대신에 쓰이는 '여성적인'은 여자들이 자신을 '여성적으로',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 기꺼이 거금을 들여 멋진
핸드백이나 원피스, 구두, 숄 따위를 사들이게 하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요새는 '여성스럽다'는 말마저 덩달아 유행을 하고있는데, 의미자락은 '여성적이다'와 거의 같다. 좀더 친근한 한국말 접
미사를 응용했을 뿐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대목에서만큼은 '여자'가 완패를 하고 만다는 사실이다. '여자답다'는 말은 다소곳하며 나서지 않으며 남성과 위계질서에 종속적이고 자기역할에 성실하다는, 현대 여성의 입
장에서는 대단히 모욕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따라서 '페미닌'을 '여자답다'라고 번역할 수는 절대 없었을 것이다.
서양쪽에서는 80년대에 극악무도할 정도의 어깨뻥을 넣은 정장에서 남성적이고 힘을 가진 여성의 이미지를 찾고, 대신 90년대 들어 훨씬 '여성적인' feminine, 즉 어깨가 작고 날씬하며 몸의 선
을 잘 드러내는 경향이 주가 되는 것을 이미 권리를 많이 찾은 여성들이 이제 어깨에 힘 좀 빼고 쾌락과 행복을 누려보자는 것으로 이해한다. 글쎄, 68년의 문화혁명도 모르고 노브라 혁명도 모르
는 한국사람들이야 어깨뻥이 들어가는 빠지든 그것이 그다지 '여성의 힘'과 큰 관련이 있을까나 한다.
서양에서 나온 여성들을 위한 지침서에서는 직장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상대에게 '여자로 보이지 않게끄름' 밋밋하고 남성적으로 보이는 옷을 입어라, 하고 가르치고 있는데, 한국에서는 직장에 면접을 보러가는 여성들이 얼마나 치마정장을 많이 입는가를 생각할 때, 이것이 여성의 지위
가 더 확고해서인지 아니면 그 반대여서인지 알 수가 없다. 아무튼, 여자가 스스로 여자임을 가리는 옷차림을 해야만 성공하는 나라가 아니어서 그 점은 다행일 지도 모른다.
요즘 들어 드디어 80년대 복고풍이 돈을 벌어보겠다고 겨울코트부터 해서 발악을 하고있는데, 80년대의 극악한 어깨뻥을 '사무직 여성의 융성=여성의 권리 신장'으로 맘편히 해석하기엔 너무나
복잡다단한 이 탈산업화 정보화 사회에서는 어떤 해프닝으로 일어날지 조금은 궁금하다. 실은, 소재와 무늬 디자인 등은 조금씩 80년대가 차용되고 있지만 어깨뻥만큼은 아직 전혀 그 근처도 못
간 것이 지금의 실상이다. 아직은 냄새만 조금 피우고 있을 뿐 '경기 좋던 시절'이든 '전투적인 여성'이든 간에 그림자도 내비치지 않고 있는, '없는', 빈껍데기 80년대 복고다.
'여성적인', 너무나 '여성스러운' 디자인이에요, 등의 광고에는 두드러기를 일으키면서도 제법 '남성적'이라는, 극악한 어깨뻥의 80년대 패션은 절대 미워하며 상대적으로 여성적이라는 70년대 패
션에는 절대 즐거워하는 나의 경향을 표면적으로 본다면, 뭔가 앞뒤가 안 맞는 듯도 하긴 하다. 그러나 실상 80년대 패션을 미워하는 이유가 '여성적이지 않아서'는 아닐 것이다. 여성스러운 실
루엣을 자랑하든 안 하든 간에, 패션은 미감을 충족하는 것이며 내가 '되고 싶은 모양'으로 될 수 있게 하는 필수적인 과정이다. 아마도 나는 전투하느라 바빠 쾌락을 챙기지 못했던 여성선배들의
과정을 되풀이하기 싫은 모양이며, 여자로서 가질 수 있는 모든 좋은 것들은 다 가지면서도 능력있는 현대인으로서 가질 수 있는 최대의 힘을 갖기를 원하는가 보다.
2000.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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