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자동차를 몰고 여행을 떠나는 여자들
back to noculture
쇼데르로스 드 라클로의 소설
[위험한 관계](1782)는
[위험한 관계](Les Liaisons dangereuses, Roger Vadim, 1959),
[발몽](밀로스 포만),
[위험한 관계](dangerous liaisons, 스티븐 프리어즈, 1988) 등으로 영화화되었다.
이 스토리를 현재의 십대버전으로 리메이크한
[사랑보다 아름다운 유혹](cruel intentions, 로저 컴블)
을 보면, 마지막에 발몽(세바스찬)이 죽은 후 투르벨 부인(아네트-리즈 위더스푼)은 죽지 않는다. 백작부인(사라 미셀 겔러)에게 멋지게 복수를 한 후 발몽이 남긴
멋진 스포츠카를 몰고 썬글라스를 쓰고서 어딘가로, 너른 대륙으로 떠나는 것이다.
존 말코비치와 글렌 클로즈의 소름끼치는 연기, 극적 긴장감과 재미로 철철 넘쳤던
[위험한 관계](1988)에 비하면 아무래도 약하지만, 그래도
십대버전인 만큼 배우 얼굴 보는 재미도 좀 있었고, 마지막에 허술하게 처리한 것도 이해는
가는 일이다.
그렇다. 이해는 가는 일이다. 죽었어야 할 여자가, 죽어서 완벽한 카타르시스를 남기고 사라져야
할 여자가 살아서, 힘차게 악셀레이터를 밟으며 영원한 사랑을 약속한 애인이 남겨둔 너른
세상으로 나아간다는 상당히 긍정적인 결말은 헐리우드영화다운 일종의 타협안일 수도 있다.
역시 완벽한 비극은 부담스럽다. 요즘 십대의 윤리수준을 생각하더라도, 끝이 죽음이 될
정도로 강렬한 사랑이니 질투니 하는 것은 좀 말이 안 되니까.
그런데 재미있게도, 이보다 훨씬 인기가 덜한 영화
[소년은 울지 않는다] 역시 마지막 장면은 남겨진 여자가
자동차를 몰고 자기 애인이 꿈꾸었던 도시들을 향해 가는 것이다.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탔다고 해도 역시 '자기학대적인 영화보기'가 될 수밖에 없는 이 꿀꿀한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앞서의 영화와는 전혀 달라서, 비극의 연속 끝에 떠오르는 단 하나의 희망으로서, 굽히지
않은 인간의 생명력과 존엄성, 의지를 담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남자가 아니라 여자가
죽지만, '사랑의 결속 속에 살아남은 여자의 결연한 여행'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그리고 그
'떠남'이 자유의 의미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이것은 주로 미국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장면이다. 국경 따위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너른 대륙,
끝없이 이어지는 도로와 수없이 다가오는 도시들, 그 속의 가지각색의 인간들의 삶, 그 속에
홀로 떠나는 자유. 이 홀가분한 자유를 위해서는 개인에게는 자동차가, 대륙에게는 주유소가
필요하다. 지금 시대에서, 즉 농경시대를 이전으로 보내버리려 애쓰는 문명에서 자유로운
삶을 위해서는 자동차라는 개인의 도구와 주유소라는 사회적 토대가 필요한 셈이다. 물론,
예전에 히피들에겐 그런 것도 필요없었다. 옛날 우리의 티비를 채웠던 방랑자 시리즈는
자기 발로 걸어서도 충분히 꿈과 모험이 가능했었다. 그러나 지금 세상에서는 자유롭기 위해
필요한 것이 자동차인 셈이다.
물론 이건 미국의 얘기고, 한국의 기준은 다르다. 이 나라는 자동차가 아니라 집이 필요하다.
그 다음에야 잘 살든 밖에 나가 살든 가능해진다. 혈연 지연 학연 연으로만 모든 것이 가능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부동산이 너무 비싸서 삶의 개혁이 어려운 나라니까.
중요한 것은, 애인의 죽음으로 더 크고 깊고 무서운 삶을 받아 안고 떠나는 역을 맡는 쪽이
여자들이라는 것이다. 소설이나 영화는 한 편의 작품 안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관계를 만들고,
그것을 영속화할 시련이나 죽음을 준비한다. 나의 기억으로는 소설 치고 남자가 아니라
여자가 남겨지는 케이스가 정말이지 없었다. 어쩌면 요즘 한국 소설은 모조리 여자 작가들밖에
없는 것 같으니, 모두 여자가 남겨질 지도 모르겠지만. (요즘엔 소설을 잘 안 봐서 모르겠다.)
이건 어쩌면 요즘 영화라는 것에 흐르고 있는 유행일 지도 모르겠다. 결국엔 '독립적 여성상'을
그려내어야 여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고, 찜찜하지 않은 마무리를 할 수 있다는, 그런 계산이
밑에 깔려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쨋든, 우연찮게 두 영화가 같은 라스트씬을 마련한 것은
시대의 솔직한 욕망이라고 난 본다.
여자는 자유를 원한다. 마구잡이 개척하는 자유 끝의 허무로 가지 않기 위해서 '자율'이니
'생의 충만함'이니를 챙기는 것도 역시 자유을 얻은 다음의 일이다. 우리 삶의 웃기고도
비극적인 이원론들은 서로 화해해야 하지만, 딸들은 땅과 그저 화해할 수 없다. 가져보지도 못한
하늘을 두고서는, 모든 화해는 협잡이나 착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난 하늘의 아들들이
아무 의심 없이 땅의 헌신이나 희생을 추켜올리는 것에 대해서 의심한다. 사기가 아닐런지.
아들들이 진창을 구르고, 딸들이 티끌 하나 없이 가뿐하게 하늘을 날아본 이후에만, 작은
화해라도 진정한 이해에서부터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직도 갈 길은 멀다.
2001.2.17
back to nocul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