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질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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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먼 옛날, 대한민국 육군이 60만이었던 시절, [질투]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만약 최진실을 울리면 60만 대군이 탈영할거라는 우려에 의해 극의 결말이 바뀌어
해피엔딩이 되었었다. 그 남자들이 지금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무엇을 하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정말이지 드라마 제목 하나는 기가 막히게 지은것이 아닌가,
난 지금도 가끔 그 생각을 한다.
마광수 교수의 이론에 따르면, 드라마의 요건은 '질투와 선망'이다.
질투는 잘나고 잘생긴 주인공들을 향한 질시로서,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이 죽도록 고생하고 애태우는 것을 보면서 즐기는 쾌
감으로 이어진다. 선망은 나도 잘나고 잘생긴 주인공처럼 되보았으면 하는것, 혹은 잘나고 잘생긴
주인공인양 느끼면서 그 이야기 속에 감정이입해 연애와 성공 등의 굴곡들을 즐기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의 드라마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비극의 요건, '공포와 연민'의 매커니즘과는 구
별되는, '같은 자로 잴 수 없는', 전연 다른 것이 된다는 것이다. 정말이지 명료하기 짝이없는 대
별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너무나 고귀하고 완벽한 주인공들이, 그 완벽함 속에 끼어들어간 하찮은 인간적인 실수, 혼돈으
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나아가는 것에서, 자기 앞의 자잘한 삶들을 넘어서는 커다란
삶과 죽음, 운명이라는 것에 대해 공포를 느끼고, 주인공들의 고통과 감정에 진저리치며 연민을
느끼는 것은 그리스인들에게나, 혹은 서양인들에게나 적합한 카타르시스의 방법이지 우리 동양인,
특히 한국인들에게는 맞는 방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자면 사상체질론까지 동원한 서양인과 동양인의 체질 차이에서 오는 드라마의
차이까지 갈 수 있겠지만, 정확한 인용문을 찾기가 힘들어 오늘은 생략하기로 하겠다. 단, 서양에
서는 비극이 동양에서는 희극이 번성한 것은 그 체질의 차이라는 점은 아주 명백한 것으로 보인
다.
그외에도, 한국의 드라마는 중장년층 그중에서도 여성들을 주시청자로 하는 속성 때문에 '질투와
선망' 외에도 '푼수같은년 혹은 못된년을 만들어 죄 다 뒤집어씌우고 나중에 화해하기'라든가 그
보다 넓게는 '모든 싸움을 여자들끼리의 싸움으로 치환하기' 등등의 중요한 법칙들이 있지만, 지
금 그것까지는 다루지 않겠다.
인간이 질투를 하는 이유는 남이 가진 것을 자기도 가지려 들어서 결과적으로 더 많은 식량과
더 좋은 조건을 얻고, 더 확실하게 유전자를 남기려는 것이라고, 난 단순하게 생각한다.
진화과정에서 질투심이 축적된 까닭은 아마도 그럴 것이다. 사랑이나 착함, 인내, 희생정신 등
그 반대급부의 윤리관이 체계적으로 정비되어 사회의 겉윤리를 형성하면서 불쌍한 꼴이 되기는
하였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체면치레일 뿐이고 인간 내부의 동인은 확실히 질투, 허영
심, 이기심 등으로 너무나 강하기 때문에 일부러 자제를 시킬 필요가 있는 것들이다.
질투는 '치졸한 감정'이라고 치부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의 질투심을 감추고자 여러가지 위장
술을 동반한다. 대표적인 것이 자기에겐 전혀 가능성도 없는 '사랑의 나날'들이 앞으로 창창히 남
아있는 청춘들을 질투하는걸 '도덕'이니 '청소년 보호'로 위장하는 늙은이들, 또 자기는 못 받는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남자들한테 인기끄는 미인들을 비난하는 페미니스트들이다.
드라마는 사람들이 자기 질투를 적나라하게 까놓고 즐기지 못하는 소심함, 혹은 양심이라는 것
을 생각해서 '욕을 해도 좋을' 적당히 그럴싸한 요소들을 삽입한다. 즉, 너무나 착하고 순진한 여
주인공이 왕부자착한남의 사랑을 받지만, 좀 지나치게 바보같아서 욕을 해줘도 된다든지, 여자들
이 선망하는 왕공주의 조건을 다 가진 여자에게는 반드시 중대한 성격적인 결함이 있다든지 하는
식이다.
우리는 자신이 갖고 싶어하는 외모, 재능, 사회적 성공, 멋진 짝 등을 다 갖고 나오는 주인공들
을 보고 감정이입을 하며 즐겁고 싶지만, 실제로 다 갖춘 주인공이 나오면 배가 아프다. 그래서
드라마는 선망과 질투의 감정을 적절히, 가장 대중적인 수위에서 조절하는 기술을 익혀 성공하려
고 든다.
시오노 나나미는 [남자들에게]라는 재미난 에세이집에서 '질투와 선망'에 관한 대단히 재밌고 명
료한 구분을 들고나온다. '질투는 가지고 있는 것을 잃는 데 대한 두려움이요, 선망은 가지가 갖
지 못한 것을 가진 사람을 부러워하는 감정이라는 것이다.' 이건 우리가 일반적으로 쓰는 '선망'의
용법과는 다르다.
시오노 나나미가 들은 예는 [오델로]로서, 자기 아내가 바람을 피운다고 믿은 오델로는 강렬한
질투심을 느꼈으나, 거짓말을 꾸며대어 이 오델로를 파멸로 이끈 이야고가 가진 것은 선망이지
질투심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기것을 빼앗은, 혹은 빼앗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에 대한 감정과 자기는 절대 갖지 못할 것을
가진 사람에 대한 감정은 그 급수가 달라서 선망은 기독교에서 일곱 대죄로 오르는 영광을 안았
지만 질투는 거기에 끼지 못했다. 즉 자기것을 지키려다 발생한 지나침은 용서가 되지만 자기분
수를 모르는 지나침은 용서가 안 된다는 것일까?
최소한 한국말의 용법으로는 선망은 죄가 되지 않는다. 요즘 세상이 분수를 모르고 날뛰는 죄보
다는 자기의 가능성을 몽땅 가두어버리고 삭아가는 인생의 쓸쓸함을 더 안 좋은 것으로 여기기
때문인 것인지?
이러다간 질투도 복권될지 모르겠다.
200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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