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프한이탈리아여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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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물어봐야하기 때문에 (그리고 나는 이탈리아말을 잘 못하고 이탈리아인들도 영어를 잘 못하기 때문에) 언제나 웃는 낯으로 다니면서 일본여자로 오해받곤 하는 한국인 관광객인 나를 기준으로 볼 때, 이탈리아여자들은 확실히 거만하고 터프하다. 물론 단지 관광객으로서 몇주 본 것으로 이탈리아 여자들은 이렇더라, 하고 단정하는 것은 말이 안 되겠지만, 거리에서 까페에서 미술관에서 마주치는 여자들, 그리고 상점, 호텔, 미술관, 기차역 등 각종 관광객 상대 업종의 여자들을 피상적이나마 다소 주의깊게 관찰했을 때 얻을 수 있는 잠정적 결론은 그러했다.

사람들 통제하는데 진력이 난, 마치 한국의 공무원들 같은 미술관 직원들을 제외한다면, 이탈리아인들의 매너는 대개 훌륭하다. 사람을 대하면 친절하기 이를데 없고, 정이 넘친다. 그런데, 여자들은 훨씬 터프하다. 이 나라에서 새롭게 깨달은 사실은, 친절하게 행동하는 것과 사근사근하게 구는 것은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온도시들에서 친절하기 이를데없었던 나이든 부인네들 외에도 나폴리에서 나를 목적지 근처까지 데려다준 예쁜 아가씨나 베로나에서 길을 가르쳐준 어린 여학생 역시, 웃을 땐 환하게 웃지만 아닐 땐 무표정한, 나름의 절제와 균형의 매너를 지키고 있다.

내 눈에 비친 이 ‘놀라운 오만과 터프’를 이탈리아 국내 기준에 맞게 번역한다면 아마도 ‘당연한 인간의 자존과 솔직함’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여자들도 일부러 귀여운 척 예쁜 척을 하지 않는다. 힙본 바지에다 화장을 떡칠하고서 담배를 뻑뻑 피워대는 그 여자들, 모두 친절시민이다. (나이 어린 여자들은 간혹 공공장소의 예절의식이 부족하기도 하다.) 그래서 나에겐 무척 흥미롭지만 그들에겐 너무나 당연한 사실은 이 나라 여자들은 아줌마와 아가씨의 구분이 없다는 것이다!

'아가씨'란 이러이러해야 한다, 라는 사회적 함의가 통용되며, 그에 맞춰 ’예쁘고 참한 아가씨‘ 혹은 ’멋진 여자‘가 되기 위해 갖가지 내숭을 익혀 구사해야 하는 압박에 시달리는 한국의 여자들과는 전혀 다르게, 그리고 젊은 아가씨처럼 보이기 위해서는 아줌마들도 아가씨처럼 귀엽고 사근사근해야하는 한국과는 전혀 다르게, 이탈리아 여자들은 애어른 할 것 없이 모조리 아줌마처럼 터프하다. 그리고 이것은 나 혼자만의 결론이 아니다. 내가 아는 피렌체의 한국인 유학생은 절대동감! 및 (터프함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당당한 여성’이라는 말은 티비광고에서나 들을 수 있고 실제로는 내숭이 높은 값으로 통용되는 한국이라는 나라의 체질을 개선하여 투명한 매너가 유통되기를 바라는 나로서도 당연 당당하게 사는 거기 여자들이 좋아보인다. 장점에서 오는 단점도 있긴 하다. 길거리에서 담배 피우는 사람이 배로 많아서 배로 괴로웠다. -.-;

터프함에 이은 이탈리아 아가씨들의 주요 특징은 뚱뚱한 몸매로도 잘만 패셔너블하게 하고 다닌다는 것이다. 물론 젊은 여자 중엔 날씬한 여자들은 엄청 날씬하고, 진짜로 예쁜 여자들도 간혹 있지만, 그런 ‘킹카’들이랑 같이 다니는 뚱뚱한 여자들 역시 위풍당당하기 이를데 없다. 정말이지 멋있는 여자들이다. 맘에 들었다.

어쩌면 이탈리아 여자들이 뚱뚱해도 잘난 것은 거리거리에 미술관에 널린 벗은 여자들의 조각상들이 하나같이 풍만해서인지도 모른다. ^^ 비록 20세기 이후에 제작된 것이 확실한 광고판들의 모델들은 비쩍 마른 ‘정상적인’ 요즘 미인상을 구현하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어쩌면, 인간이 인간으로 대접받는데 다른 무슨 이유가 필요하냐는, 신 아래 엎드렸던 중세를 거센 몸짓으로 거부하고 나선 르네상스의 유산을 (관광업만으로도 자자손손 먹고 살만큼) 풍부하게 물려받은 이탈리아인들이니 그 정도야 당연한게 아닐까 한다.

사실 이 나라에서는 한국이나 일본의 귀엽고 어린애같은 미녀들은 완전히 뭐취급당하겠군, 하고 느낀 것은 빠리 관광을 시작한 첫날 루브르 외관을 장악(장식이 아니라)하고 있는 여신들의 위풍당당한 팔뚝과 치마자락을 본 순간부터였다. 며칠 안 있었으니 결론을 내릴 수는 없었지만, 어쩌면 ‘오만과 터프’는 범유럽적인 현상일 지도 모른다. 매력적인 여자가 되기 위해 날씬하고 예쁘고 귀엽고 싹싹해야 하는 나라가 어쩌면 소수일 지도 모른다. 이 가설을 검증하기 위해 또 다시 여행을 가야할 듯하다.

--남승희

캠퍼스스타일 우먼칼럼 2002년 1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