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신어의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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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지역성

현재 인터넷이 일으킨 언어생활의 변화는 꽤 극적이다. 그러나 인류사 전체의 흐름에서 보자면, 사는 곳도 하는 일도 다르고 만나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잠깐 접속하여 떠들어대는 ‘자기 세대의 언어’라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보다는 극적일 수 없을 지도 모른다. 물론 이것은 인터넷 이전에 근대교육의 덕분이다. 예전의 지역적이고 폐쇄적인 농경사회에서는 산 하나만 건너가도 말이 안 통하는 게 많았었다. 지금의 지구화, 세계화된 전자시대에서는 지구 건너편의 네티즌과도 관심사만 통한다면 영어로 격조있는 대화를 나눌 수가 있다. 국내에서 동호회 커뮤니티 중심으로 만들어진 방언쯤은 문제도 아니다. 그러니까, 한국어는 이미 표준어로 통일되었기에 통신어로 분화가 가능했다.

인류문화의 근간을 형성하는 지역성을 무자비하게 무시하고 이룩한 근대화의 최신 결과가, 역설적으로 사이버 공간 안에 태어난 새로운 지역성이라는 것이 재미있다. 그러나 통신어의 지역성이라는 것은 과거의 지역성과는 다르다. 단지 접속을 많이 하고 안 하고의 차이로 소통의 한계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네’가 아니면 못 알아들을 말들을 계속 만들어내는 은어집단의 성격을 가진다. 그래서 통신어에 대한 세간의 반발감에는 그 빤한 한국어 중에 자기가 못 알아듣는 말이 나오는 ‘이해불가능한 상황’이 어떻게 발생할 수가 있는가, 하는 불쾌감이 깊이 자리하고 있기도 하다.

지역적순환?

통신어가 문제시되는 첫번째 이유가 널리 소통이 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고 한다면, 그 두 번째 이유는 소통이 되지 않는 이유가 정상참작이 불가능하기에, 즉 남들을 소외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있기에 무례하다는 점에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널리 소통되어야 옳다고 하는 언어의 법칙에는 그 법칙을 적용하는 한계가 있다. 그것은 넓은 의미에서 지역성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인간의 언어생활에 있어 널리 소통하는 것만이 올바른 원칙이라면, 우리 모두는 영어를 쓰고 있어야 할 것이다. 한편으로 전문가들은 자기네의 편리와 정확성을 위해 전문용어를 쓰며, 이것은 대중적인 학술서가 아닌 한 반드시 일상어로 풀어써야할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통신어 또한 자기의 지역성을 지키는 한에 있어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현재 지구적인 트렌드인 생태주의의 관점을 도입해보자면, 퍼머컬처?(유기농법)의 기본 아이디어는 에너지의 순환을 지역화함으로써 인간 생활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다. 순환을 지역화하면 순환주기는 짧아진다. 그렇게 되면 순환은 더 완전해진다. 유통과정의 부산물이나 적체된 쓰레기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통신어 문제에 있어서도 지역적으로 순환되고 그 안에서 정화된다면 어떤 유행어이건 간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새로운 윤리를 정립하면 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가끔씩 깜찍한 이모티콘을 써도 좋을 공간과 내키는 대로 외계어 범벅을 만들어도 좋을 공간, 절대로 표준어 및 존대말 엄수를 할 공간과 하오체를 남발하며 즐길 공간을 구분하고, 장소에 맞는 언어예절을 지켜주는 네티켓을 세우는 것이다. 공적 성격이 높은 장소일수록 표준어 지향성이 높아지고, 사적 성격이 높을수록 그 공간 나름의 언어유희 지향성이 높아진다. 네티즌 개인은 자기 마음대로가 아니라 공간 나름대로 언어를 선택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두 번째 문제인 은어지향성 또한 자연히 극복하는 것이다. 각 통신어들이 공공 영역을 인정하고 자기의 지역성을 지키게 되면, 거기까지 찾아와서 소외감 느낀다고 하는 쪽이 비정상일 것이다.

통신어의 존재 이유

당연히, 표준어 쓰기 운동은 유연한 대처방안이라고 할 수 없다. 언어가 삶의 도구인 한엔, 지키는 것은 목적이 될 수 없다. 잘 쓰는 것이 목적이 될 뿐이다. 즐기는 것도 훌륭한 목적이 된다. 음절 축약의 경제성도 번듯한 이유가 된다. 구어체의 맛을 내기 위해 첨가되는 자음 파편들도 자기의 존재 이유가 있다. 요즘 하오체 트렌드가 형성되는 것에 대해, 최소한의 상호존중으로 성립되는 수평적인 인간관계를 건설하고자 하는 집단적 열망이 근저에 있기 때문이라고 난 본다. 하오체는 자기를 낮추는 일 없이 상대를 높여줄 수 있는 유일한 어법이다.

이 세상에 사적 언어는 절대로 공적 영역을 침범할 수 없다는 원칙 같은 건 본래 없다. 그것은 단지 적정한 수준으로 지켜주어야할 공중도덕인 것이고, 언어의 트렌드는 그보다는 훨씬 크다. 사적 언어가 발달해서 공적 영역으로 나아갈 때, 예전엔 소설이 나왔었다. 지금 인터넷이 세상을 크게 바꾸는 점이 있다면 구술성과 문자성의 혼융이라고 할 수 있다. 통신어 현상을 놓고 대개는 구어가 문어에 침투한 것만을 지적하지만, 동시에 문자가 우리 말과 생각 속에 젖어들은 최근의 결과로서 우리는 손가락으로 채팅을 하고 쇼핑을 하는 것이기도 하다. 문자는 지금 기계복제의 시대보다 더 깊은 차원에서 우리 안에 내면화되고 있는 중이다. 이 운동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나도 지금으로선 잘 모르겠다.

통신어는 표준어가 될 수 있나?

통신어는 방언이기를 지향하기 때문에 표준어가 될 수 없다. 그러나 그중 대중적인 단어는 사전에 실릴 것이고, 그중에서도 일부 단어는 표준어에 포함될 수 있다. 그런데 만약 표준어가 아니라 ‘규범어’가 될 수 있는가를 묻는다면, 자기의 지역성 안에서 가능하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물론 이 규범은 단지 언중의 자율성으로 지켜지며, 표준어와 같은 독특한 제도를 동원하지도 않고 근대 자본주의 본위의 경제적 문화적 단위로 경계짓지도 않는다. 그러면서도 탈지역화된 공적 영역(사이버 공간)을 아우른다. 지금 우리의 삶이 산업화 혁명의 자산 위에 기초한 만큼 표준어는 앞으로도 정당성을 계속 지닐 것이고, 앞으로 전자미디어 혁명이 우리 삶에 일으킬 변화 만큼 새로운 규범은 계속해서 생성될 이유를 가질 것이다.

남승희

캠퍼스스타일 트렌드스토리 2003년 11월호

see also 1편 낡아지는말새로워지는생활 2편 표준어라는도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