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등가의 원칙 -[마니] 해루의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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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내가 열심히 소개해드린 유시진 만화 [마니] 모두들 보셨을 줄로 믿겠습니다. ^^; [마니] 내용을 모르면 무슨 소린지 감이 쉽게 안 오는 문제는 있지만, 이 글 읽은 다음에
[마니] 봐도 크게 재미가 경감되거나 하는 일은 없을테니까, 스포일러 워닝(spoiler warning 보지마, 다쳐!)은 붙이지 않겠습니다. ^^;-
[마니]가 내게 특히 흥미로왔던 것은 해루와 그의 아버지, 그리고 거기서 비롯된 해루의 철학이다. 해루의 강한 자의식과 의심없는 이기주의를 잘 설명해주는 일화들을 들쑤시자
면 끝도 없다. 그가 개인과 개인 사이에 가능하다고 믿는 것은 '거래' 뿐으로, 그는 등가의 원칙, 교환관계의 화신이라고 할 수 있다.
해루의 아버지의 죽음을 보면서 난 우리와 같은 고등생물을 탄생시킨 감수분열과 죽음의 진화과정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생명은 유성생식라는 감수분열의 방식을 택함으로써
복잡한 동물의 진화를 향해 나아갔고, 개체의 죽음을 그 대가로 지불했다. 아버지의 죽음=아들의 생명.
단세포 동물은 분열을 하며 자식을 만드는게 아니라 자기자신을 두 개로 나눈다. 따라서, 30억년전의 단세포동물은 어찌보면 그때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살아있다고 할 수 있다. 잡
아먹히거나 사고사를 당하지 않고 분열을 계속한 이상 말이다. 그러나 많은 단세포 동물은 공생을 택하고 다세포 동물이 되었으며, 기관이 생기고, 개체는 마침내 지성을 결집한
뇌까지 가지게 되었다. 이제 개체는 자연사와 함께 노화라는 운명을 안게 되고, 이것을 자식과 바꾸게 된다.
죽음과 생명과의 관계를 쉽게 이해하려면 우리가 사는 사회를 보면 된다. 대개 부모의 젊음과 자식의 성장은 맞바꾸어진다. 가장 쉽게는 MBC 드라마 [전원일기]를 보면 알 수
있는데, 시어머니는 며느리에게 '내 흰 머리 하나 나는게 자식 키 한뼘 크는 거고, 내 주름살 하나 느는게 ...... 그걸 생각하면 가는 세월 서럽지 않다'는 요지의 충고를 해준다. 이
것은 단지 은유가 아니다. 부모는 죽음의 대가로 자식을 가진 것이고 이 개체들의 노화와
죽음을 통해 종은 더 복잡한 것으로 진화할 수 있었다.
문제는, 자식이 자라나서 '나'가 되어 하는 선택이다. 해루는 '아이를 낳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그의 유일한 사랑을 버리면서까지 관철시킨 그의 생존양식이자, 철학이
다. 자기의 생명이 최우선이며 선인 그에게는, 자식을 얻는 방식으로 자신의 죽음을 인정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자식은 자기의 생명의 예비책일 뿐만 아니라 언젠가는 찾아
올 자기의 죽음을 전제로 경우에 따라선 우선권마저 차지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해루가 아이를 낳고 싶지 않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남들과 다른 특수한 자기의 상황과 조건에서 내린 결론이 아니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가 보여주는 지나칠 정도의 회의주
의와 자기중심주의는 유시진이 가늠해보는 하나의 가능성이다. 궤변이라도 좋으니, 가장 멀리 던져보는 반대의견인 것이다. 나 또한 분명히 던져보겠다. 이들은, 자기의 생명을 지
속하기를 원하기에, 아이를 원치 않는 것이다.
아이는 자신의 생명을 보전하는 보편적인 방편이다. 인간이기에 동물로서 유일한 방법 외에도 다른 문화적인 방법을 택할 수도 있다지만, 죽어서 이름을 남기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고, 대개 자식만을 남기게 된다. 그리고 이놈의 사회는 아이를 키울 의무를 부모에게만 지우고 있기에 개인은 엄청난 희생을 치뤄야 자식을 키울 수 있다. 그렇게 늙어가기
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아이를 갖기를 거부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실제적인 문제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자기의 존재를 어떤식으로 남기길 원하는가, 선택의 문제다. 자기의 작품으
로서 업적이나 예술품을 남기는 것은 상당한 고집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자기의 삶을 원하는-아이를 원치 않는 태도의 정반대편에 사랑이 있고 사랑의 결실이 있다는 것이 우리가 종종 인생에서 직면하는 모순이다. 이에 대해 어떤 결론을 내리고 살아
가는 것이 가장 만족스러울지는 아무도 모른다. 단지 각자는 자기를 위해 결정할 뿐이다. 주위의 참견은 아주 거세겠지만.
본래 부모의 요구는 이기적이다. 자식은 자기 생명을 어떻게든 남겨놓으려고 하는, 즉 그들의 유전자를 계속해서 전파하기 위한 '수단'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부모의 입장에선 자
식이란 영원한 생명의 대체품이며, 많은 자손들은 스페어(예비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자식들이 이기적인 부모의 말을 따라 결혼을 하고, 자손을 번성시키는 데에 전력하
지는 않는다. 필요하다면 부모보다 더 이기적이 되어, 완벽한 자기만의 생명을 추구한다. 그래서 자아가 맨처음 단절해야할 것은 자기의 생명과 이어지는 부모의 존재가 된다.
난 유시진이 단지 '자아를 탐구'하다가 잠수해버리거나 같은 자릴 맴돌거나 하지 않을 하나의 근거를 여기에서 찾아본다. 그의 '자아'는 단지 여기에 내가 있고, 저쪽에 타인이 있
고, 사회가 있는 식의 단지 공시적인 도그마가 아니다. 가장 먼저 맞부딪히는 문제는 생명이며, 자신의 생명과 부모의 생명, 그리고 자신의 선택이 어느 생명을 원해 나아가느냐의
문제를 안고 있기에, 실질적인 해결의 여행을 떠날 수 있다. 일종의 '발생론'의 미덕이라고나 할까. 단순한 당위론과는 거리가 먼, 곤혹스러움과 갈등 속에서 선택하는 문제로서 접
근하게 된다.
해루의 교환주의, 오로지 개인 대 개인으로 가능한 것은 거래뿐이라는 등가원칙은 자아를 붙잡아놓는 어떤 근친관계도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서 개인의 자유를 위한 '기본 설정'
이다. 생명과 죽음의 등가관계와 교환주의의 등가관계가 어떤 일반적인 인과적 연속성을 반드시 가져야만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해루라는 고집불통 안에서 결합
된다. 자신을 낳게 한 생명원리의 고리 속으로 투입되는 차례를 거부할 때에야, 완벽한 자아와 교환주의는 실현된다.
이 모든 일의 시작이 된 생명, 이에 대해 유시진은 상당히 분명한 어조를 보여준다.
생명력이라는 거 말이야... 그게 뭐라고 생각해?
그건 '존재'하고 싶어하는 의지일거야, 아마...
누가 딸이라든가
누가 잘난 동생을 가졌다든가
누가 용왕족이라든가
그런 시시콜콜한 이유들 때문에 위협당하고 싶어하지 않는
순수한 의지말이야
-마니-
용왕족의 법을 따라 죽기는 싫어서 여러 사람을 괴롭히며 인간계로 도망쳐온 주제에 마
니는 '시시콜콜한 이유'라고 똥배짱이다. 그 용기는 유시진의 확고한 세계관에서 나온다.
생명을 지키는 것은 자기를 만든 공동체의 법이 어떻고 요구가 어떻기 전에 생명체로서
가지는 당연한 욕망이며 권리이다.
그가 생명력이라는 주제를 가졌다는 사실은 '자아라는 것을 갖는 일의 어려움'이라는 문
제에서 그치지 않고 '다른' 존재 형태와 고민의 수준으로 나아가지 않을까 하는 예측을 하
게 한다. 내가 그쪽이라 자꾸 이런 예측으로 나가는지도 모르지만, ^^;; 어쨋거나 주어진
작품에서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유시진이라는 세계를 마주해서, 나는 최대한 멀리 던져 보
고, 되도록 낯선, 끝내주는 조각을 맞추어 보고있다.
자아가 자기 바깥에 바로 등가의 슬픔-외로움이라는 걸 가지고 있다고 하면, 생명력은
자기 밖에 어느 무엇도 가지고 있지 않다. 자기와 대립하는 세상이라는 것을 가지지 않고,
도리어 자기-세계와 대립하는 몇몇의 특수한 적들을 간간히 맞부딪히며, 현명하게 이를
극복하고 살아간다.
생물의 진화 스토리에서 아주 극적인 대성공의 사례는 적이 도리어 친구가 되는 공생의
터득이다. 20억년전에 대기권에 노폐물인 산소가 쌓여 전지구 생명체가 치명적인 위험에
처하게 되었을 때, 몇몇 박테리아들이 오염물질인 산소를 (Oh, my...) 세상에나 호흡하는
방법을 개발해서 도리어 고등동물의 진화를 촉진하게 된 역사가 난 특히 흥미롭다.
(좀 있다가 관련글을 쓸 예정입니다.)
나라고 하는 존재가 갖는 이기주의, 고집 위로 이어지는 네트와 전자기 가이아가 어떤
공진화를 이룩할지도 궁금하고. 시시콜콜한 이유들에 눌려버리지 않고 튕겨오르는, 강한
의지가 어떤 변주를 보여줄지도 궁금하다. 어쨋건 생명은 자아보다 휠씬 앞에 있으며, 그
형태는 계속해서 진화한다. 그것이 곧 어떤 결과를 만들것이다.
2000년에 시작하려다가 1998년 여자만화 [나인]의 출간으로 일찍 빛을 보고 나와 시진매
니아들을 광분에 싸이게 한 거대 환타지 [신명기], 난 이것을 단지 인간사회의 권력과 성,
전쟁의 문제들을 투사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타마라의 자아는 일말의 의심도 없
는 것이다. '남'과 '시선'은 그에게 존재하지 않으며 스스로에게조차 그렇다. 자아와 개인을
대체하는 힘과 신(다른 형태?), 그것이 유시진이 시험해보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추측해본
다.
1999.12.21
->유시진 연구
유시진 공식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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