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여자는 투쟁이 아니라 사랑을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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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미니즘이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
많은 여자들이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하며, 이 풍진 세상의 갖가지 여성차별에 맞서 항의하고, 좌절하고, 열을 받곤 한다. 그러나, 훨씬 더 많은
여자들이 그런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하면서 오로지 인생에서 자기가 얻을 수 있는 최대한의 것을 얻으려 애쓰고 있다.
페미니즘이 인류역사에 등장한 것은 서구의 산업화시대부터다. 페미니즘은 여성의 교육권을 쟁취하고, 선거권을 쟁취하고, 노브라의 권리를 쟁취하고,
많은 것을 쟁취해왔다. 그러나, 여전히 페미니즘은 다수 여자들에게 인기가 없다. 살기가 좋아져서, 라고 헛소리하기에는 아직도 여성은 많은 굴레를 안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난 오랫동안 여성의 질곡들에 대해 고민했고 문제를 풀어나갈 나름의 길을 깨쳐왔고, 이제 이 문제에 대해서 분명한 답변을
제공하고자 한다.
그것은, 여자들은 투쟁이 아니라 사랑을 원하기 때문이다.
아주 통속적인듯이 보이는 이 명제가 그 수많은 눈물과 고통의 바다에서 헤매는 여자들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권리를 찾으려 투쟁한 수많은 순교자들의
업적에도 불구하고, 산업화와 함께 강대해진 여자들의 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여성이라는 존재가 억압과 차별을 받는 처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를
제대로 설명할 수 있다고 난 확신한다.
저항하는 자는 진다
투쟁이 아니라 사랑을 원하는 것은 남자들도 대개 마찬가지일 것이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말이다. 전쟁 중이거나, 암컷을 놓고 우열을 가리는
중이라거나, 세상에 제맘대로 되는게 하나도 없어서 울분을 어디다 풀어놓아야 할지 모르겠는 청춘이 아니라면 말이다.
저항하는 자가 불리한 것은, 힘이 없기 때문에 패배하고 만다는 눈앞에 보이는 당장의 상황뿐만이 아니다. 그보다 훨씬 문제가 되는 것은, 저항하는
자는 자신이 그만큼 자기의 모습을 가질 수 없다는 점에 있다. 즉 적의 이름으로 자신을 규정하고, 적의 모습에 대하여서만 자기 모습을 갖는 것이다.
저항하는 사람도 '저항자'로서의 자기 외에도 생명체로서 다양한 사회적 관계 속의 인간으로서 많은 자기를 갖고 있으나, 저항의 '가치' 아래에서 나머지
부분은 없는 것인양 무시되며, 적과 싸워 이기기 위해 적의 능력을, 적의 모습을 닮게 된다. 이렇게 되면 결국 싸우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다다르게 되는 것이다.
그 힘겨운 투쟁을 하기 위해서는 남자들과 부딪혀야 하고, 일상은 전투가 되며, 직업적으로 성공하는 데도 무리가 따를 뿐더러 무엇보다도 이런 여자를
반길 남자가 별로 없으니 좋은 남자를 얻을 확율이 극악하게 떨어질 것이다. 이렇게 되면, 유전자를 남길 수 없다. 한마디로 현재의 쾌락과 행복을 포기하는
것은 보통 인간이 하기엔 역시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다.
분노는 간에 무리를 일으킨다
또 한가지 무시할 수 없는 진리는, 계속해서 분노를 일으키며 사는 것은 얼마 안 있어 간에 무리를 일으키기 때문에, 오랫동안 지속할 수 있는 삶의 방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도 아파보고야 알았는데, 분노는 사람의 간에 무리를 일으켜서, 오랫동안 계속할 수 없는 정신상태다.
'오랫동안 분노를 일으키는' 사람들은 대개 어쩔 수 없이 혹은 대의를 위해 건강을 해치는 사람들이거나 분노를 가장하고서 자기몫을 찾으려 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간이 정말 튼튼해서 무슨 짓을 해도 끄덕도 없는 사람은 굳이 분노를 일으키고 자시고 할 일이 없을 것이다. 남의 분노나 일으키는
짓이나 하고 다니지 않으면 다행이다.) 몇년 해보고 나서는 항복하든지 아니면 투쟁을 하는 척 수작을 부리든지, 둘 중 하나가 대개의 페미니스트 여자들이
가는 길이다.
여자들이 투쟁 대신 타협을 택하는 이유
사람을 미워하고 사회에 반대하는 것은 무척 스스로에게 힘들고 지치는 일이다. 그래서 많은 여자들은 체념하고 달관하며, '져주는게 편하지' 라고
자신을 위로하며 일생을 산다. 그 방식에 대해서 무조건 '비겁하다'고 비난하는 것은 너무나 세상에 무지한 까닭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엔 세대차이란 것이
있다. 사회의 변화는 이미 져주는 것이 능사가 아닌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을 노세대들은 많이 모르는 것 같다.
많은 여자들은 페미니즘을 믿지 않고, 자기 나름의 길을 개척한다. 그 길은 투쟁과 타협, 여러가지 양상들이 있겠으나, 어디까지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이를테면 사랑과 행복을 위해, 즐거움을 위해 산다는 기본 원칙에 충실하다.
그 여자들은 패배주의적인지는 몰라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 자기의 행복을 위해서. 어디까지 타협하고, 어디까지 절대 물러서지 않을것인가, 수없는
싸움들, 갈등들이 여자들한테 다가온다. 어떤 경우에든, 여자들은 언제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타협하는 것이다. 가능한 한 최대의 행복을
얻기 위해서.
호르몬이 다르다
여자는 테스토스테론 호르몬이 남성만큼 콸콸 솟지가 않기 때문에, 싸움에 불리하다. 밑도 끝도 없는 경쟁만을 위해 자기 인생의 나머지를 포기하고
덤벼들어 최고의 자리를 쟁취하는 것은 영 체질에 안 맞는 여자가 대부분이다. 사회적인 힘을 갖기위해 쟁탈전에 뛰어든 많은 여성들은, '정당한 사회적
인정'을 받기 위해 너무나 많은 희생과 스트레스를 감내해야 한다. '남성과 똑같은 방법으로' 성공하는 것은 여성에게는 원천봉쇄 불가능하다.
** 난 대기업 간부나 국회의원 중 여성의 비율이 높아지는 것을 여성차별의 철폐나 혹여 '완화'라고 주장하는 모든 페미니스트들과 여성적 가치 내지는
여성성 두둔론자들을 때려주고 싶다. 실제 무지막지한 여성차별과 착취를 당하고 있는 여자들은 빈곤층 내지 서민층에 무더기로 깔려있는데, '지배하는
위치의 자들' 중 몇명 여자가 끼어봤자 그것이 여성억압의 사회구조를 바꾸는데 눈꼽만큼한 기여를 하는 것도 아닌데, 그저 '지수', 수치로서 여성의
해방을 말한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왕정시대에도 가끔 여왕들은 있었다. **
여자는 어디까지나 이득이나 경쟁심 따위보다는 사랑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이용당할 수도 있다. 드라마나 영화에 끝도 없이 나오는 비련의 여주인공,
순정만을 바치는 여성은 단지 남자들의 이상형일 뿐 아니라 실제로 많은 능력있고 젊은 여성들도 자기 안에 지니고 있는 '자기희생'의 버릇이다.
뜻으로는 장하게 '내 맘대로', '주체적으로 살거야' 하고 나서지만, 결국에 젊은 여자가 가질 수 있는 자유란 자기가 희생봉사할 상대를 선택할 자유 정도다.
일단 결혼을 해서 그 시스템 안에 들어서면 그 논리 안에서 싸움을 하든 행복을 추구하든인 것이다. 따라서 능력도 준비도 없이 '안일한 거부'를 행하는
것은 결국엔 자기에게 손해만 끼칠 뿐이다. 확실히 도망갈 구멍을 만들거나, 아니면 능률적으로 협상하는 법을 개발하거나, 여자는 만반의 준비가 필요하다.
내 말에 발끈할 많은 페미니스트들에게, 나는 목적을 분명히 하자고 제안하고 싶다. 여성의 목표는 페미니즘이 될 수 없다. 우리들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아름다운 삶, 모두가 자기가 원하고 그리는 멋지고 좋은 삶을 일구어내는 것이다. 여성의 문제는 일차적으로, 자기의 선택을 불가능하게 하는, '좋은
아내와 엄마'라는 제한된 역할 모델을 '전공필수'로 하지 않으면 사회적으로 매장당할 듯이 눌러대는 압력이다. 효과적인 투쟁이냐, 성공적인 도망이냐?
자기 아버지성을 따르던 어머니성을 따르던 그 모든건 사실 부차적이다. 자존심을 저버리지 않으면서 원하는 만큼의 윤택한 삶을 살 수만 있으면 된다.
존재하는 여성성, 존재하는 쾌락
그래서 여자들은 사랑을 따라가며, 쾌락을 따라간다. 여자들은 여성을 상품화하는 자본주의의 전략에 단지 결벽증으로 대처하는 페미니즘의 막다른
길을 따라가지 않는다. 여자들은 그보다 더 오래된, 남들의 선망의 시선을 받으며 즐기는 '대상화의 기쁨'을 개발하는 쪽을 택한다. 물론 이것은 '의지'로
되는 일은 아니다. 감수성의 획득이란 매카니즘으로 봐야한다. 나쁘게 말하자면, 단지 안 그러면 인생이 괴롭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대로 말하자면,
대상화의 기쁨에 비하면 그런 오해나 위험은 '사소한' 일이기 때문이다.
(->섹시한 여자의 고민)
페미니즘은 일방적인 비판만을 퍼부을 뿐 자기네들이 비판하는 '여성의 상품화'에 대해 어떤 대안도 제시하지 못한다. 그들은 능력이 안 되는 것이다.
여기 이 사회에 존재하는 여성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이상 속의 여성만을 알고 있다.
그러나, 어디서 존재하지도 않는 '여성'이라는 이상형을 위해서는 아무런 '론'도 길도 필요없다. 이 시대에 존재하는 여성은 '이러한' 사회정황 속에
놓여있는, '이러한' 감수성을 가지고서 '이러한' 행복을 원하는 인간이며, '이러한' 힘을 가지고서만 자기 인생을 끌어가고 남의 인생에 개입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점을 늘 간과하였기에 페미니즘은 지금까지의 그 치열한 투쟁에도 불구하고 지금 여자들에게 완벽한 외면을 받고있는 것이다. 지금 내가
여권론자들이 해놓은 일들, 선거권, 교육권, 직업권 등의 쟁취와 법제도 개선 등의 공헌마저 다 깔아뭉개겠다는 것은 아니다. 인정할 건 하지만, 왜 인류의
반이라는 대군을 두고서도 아직까지 이 모양이냐는 것이다. 그건, 분명 기본방법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자의 적과 남자의 적
지구 위의 인류를 둘로 나누고 있는 것은 남성과 여성이 아니라, 여성성과 남성성이다. 생물학적 사실이 아니라 사회적 역할 모델의 강제가 문제다.
인간살이의 변화에 따라 이미 고래의 역할 모델은 폐기처분되어 마땅함에도 아직도 부과되는 과중세에 대하여 우리는 탈세를 하던지 거부를 해야한다.
여자들은 남성을 적으로 하지 않고, 자신의 자유와 힘을 제약하는 모든 사회적인 테러라는 적에 대해 싸우는 것이다. 당연히, '가부장적 남성 모델'의
강제에서 탈출하여 아름다운 인생을 만들려는 남자들과 손을 잡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삶의 기쁨을 따라가는 자들'이 된다.
2000.10.24
후기
사회의 상층부에 여성이 끼어드는 비율이 높아지는 것에 대해, 지금은 다르게 생각하고 있다.
개인들의 경쟁을 통해 이룩할 수 있는 사회적 이득을 인정하는 한, 여성 참여의 비율도 의미있다.
외형적으로 남녀평등을 이루기 위해 할당제를 실시하는 제도의 보조적 역할도 필요하다.
그러나 외형적인 비율변화가 여성차별철폐에 직접 영향을 끼치는 것은 아주 적다고 생각한다. -2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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