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엽기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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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대를 뒤로 하면 유행은 촌스러워진다. 그러나, 한 시대를 더 뒤로 하면 그 유행은 정겹고 즐거운 것이 되어, 어쩌면 아름다운 것이 될 수도 있다.
위의 명제는 마치 90년대 후반을 온통 뒤덮은 70년대 복고의 물결을 설명하려고 태어난? 듯이 보인다. 그러나, 나는 2000년 젊은이 문화에서 자랑스럽게도? 화두가
된 '엽기'라는 것을 이해하는 데에도 이 명제가 아주 쓸모있다는 점을 말하련다.
요즘 티비광고를 보면 엽기적인 풍경들이 잦다. 왕아줌마 파마에 60년대?의 풍경과 나레이션이 기묘한 '갈아먹는 배' 광고, 유치찬란한 의상을 입고 관광버스 테크
노-뽕짝에 추임새를 넣는 이박사의 '메싸' 광고 등 '엽기' 광고가 은근히 한 물결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엽기, 아이 조아~ *^^*
이 엽기 유행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은 아니다. 98년에서 99년 동안 온세계를 휩쓸었던 텔레토비야말로 지금 엽기 모드의 직접적인 선배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은 '아이 좋아~' 한 마디만을 남기고 사라져버린듯 하지만. 그 알록달록 원색의 볼록 배때기 나온 외계인 텔레토비들의 그 '엽기적인' 느림, 어떤 (인간
적인) 상징도 없는 단순무상의 경지에 이르는 그 느림을 설명하기 위해 최초로 '엽기'라는 말은 본래의 '잔인무도하기 이를데 없음'의 개념에서 벗어나 '극한의 강도',
'극한의 벗어남', '극한의 깸'의 뜻으로 대중적인 쓰임새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초를 다투는 정보화 사회의 무한 경쟁의 신화에 대해 천연덕스럽게도 정확하게 반기를
드는 텔레토비의 기발함에 대해서는 나의 '텔레토비론'을 참고하시길. **
'엽기'가 그 본래의 뜻을 벗어나서 거의 '황당한 재미' 정도의 뜻으로 마구 쓰이고 있는 현재의 인기를 구가하게 된 데에는 역시 인터넷의 역할이 크다. 엽기라는 것
은 본래 그 특성상 공인윤리의 기준과는 전연 상관이 없을 것은 자명하고, 엽기가 아무리 '엽기=깸=재미'의 수준으로 자회사를 많이 거느리더라도 여전히 연결되어있
는 모기업인 원조 엽기의 인기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한 시절을 울렁울렁이게 할 수 있는 파워는 가지기 힘들 것이다. 이 모든 조건을 만족하는 것이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매체다. 개인의 힘만으로도 얼마든지 엽기 싸이트를 만들 수 있고, 심의 같
은 것 신경쓰지 않고서도 젊은이들은 여러 싸이트, 게시판, 커뮤니티들을 통해 자기네 문화를 소통할 수 있다. 네트야말로 순수엽기와 응용엽기 모두를 융성시킬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고 있는 셈이다.
이를테면, 기존 관념에서 더럽고 은밀한 것으로 여겨지는 똥에 대해서는 예전부터 '화장실 유머'라고 하는 전통적인 배설방식이 있었다. 그런데, 그것을 '시각적으
로' 드러내서 귀엽기까지 한 캐릭터로 탄생시키는 '똥 엽기'의 현상은 인터넷이 아니면 어려웠을 것이다. 쌈지의 브랜드인 '딸기'에서 선보인 '똥시리즈'는 역시 앞서
가는 쌈지가 저지를 법한 일이라고 생각이 되지만 그 인기를 유지하게 한 것은 역시 네트를 통해 일반적인게 되어버린 엽기문화인 것이다.
그동안 말로 듣던 수많은 유머들은 지금 생각하면 많이들 '엽기'가 될 자격이 충분하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그냥 '재미'였다. 지금은 홍콩의 v채널 로고를 보고 가
끔 '엽기야!' 하고 즐거워하지만, 예전에 mtv가 훨씬 잘 나갔을 적엔 비슷한 류의 황당한 로고를 보고서 쇼파를 두드리며 한 말은 '깬다, 깨!'였다. 엽기란 말은 은유
로서 시작해 인터넷을 통해 급속한 성장을 이루면서 기존의 '재미'와 '잔인무도', '혐오'의 패러다임을 온통 뒤바꾸어 놓은 것이다.
엽기의 대전제는 황당함이다. 그것도 적당한 황당함을 넘어 극한으로 가버린 골때리는 황당함, 게다가 '시각적으로' 표현되는 감각적인 충격을 (양심적인 엽기라면
꼭) 동반한다. 엽기 싸이트 마다 박힌 귀여운 똥맨 아이콘이나 앗싸 관광버스 테크노를 추는 '아줌마' 캐릭터들은 시각적으로 우리를 자극하며, 시각적인 충격으로서
웃음을 유발하고 과거를 환기시킨다. 이 발칙한 류의 즐거움이 어떻게 현대 영상물의 첨단이고 자본주의의 꽃인 티비광고에까지 이르렀나 하는 의문은 역시 우리
를 엽기 개념에 끊임없이 노출하고 훈련시킬 수 있는 시각적인 환경이 최근에 조성되었다고 하는 데서 풀린다. 그 주된 환경은 위에서 얘기한 인터넷이고 부수적
인 환경은 케이블티비 뮤직채널이다.
지금의 유치찬란한 이박사풍의 엽기광고를 들어서는 데 직접적인 전초전 역할을 한 것은 케이블티비를 통해 살포된 인디밴드 크라잉넛의 뮤직비디오 [써커스매직
유랑악단]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일단, 한국의 영상물의 흐름의 차원에서는 가장 직접적으로 연결이 된다.
** 이 뮤직비디오는 그 컨셉이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란 영화의 핵심 아이디어를 그대로 빌려온 것으로 독창성으로 말하자면 그렇게 뛰어난 것은 아니
다. 그러나 원작의 그 황당하면서도 엽기적인 캐릭터의 매력이 크라잉넛 2집의 포맷과 또 음악과 잘 어울리기에, 그리고 고대로 베끼거나 하는 경지는 아니고 그럴
싸하게 변형했고 재미있게 만들었기에 '용서해 줄 수 있는' 범위에 든다. **
노브레인의 [바다사나이]나 [청춘] 뮤직비디오나 쌈지의 '깡총'류의 이미지들이 단지 서브문화로서 케이블티비에서 끝나지 않고 [써커스매직유랑단]의 본격 엽기물
전환을 거쳐 CF에까지 엽기 트렌드를 이어갔다는 사실은 한국의 서브? 안티? 대안? 문화를 위해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아쉽게도
한국 뮤직비디오의 저력은 아니다. 아직까지 한국의 뮤직비디오는 메이저는 대개 이승환꺼 빼고는 들인 돈이 아까운 수준이고 인디쪽은 깜찍한 아이디어로 승부하
는 가끔씩의 수작 말고는 없다. 사실 뮤직비디오라고 하는 표면 밑에는 훨씬 거대한 영상물의 흐름이 있고, 시각적 감수성의 갖가지 변환이 있다.
90년대 후반 패션의 화두가 되었던 '촌스러운 것이 아름답다', 이 정신이야말로 지금의 엽기가 그 바톤을 직통으로 이어받은 선배가 될 것이다. 사실 이전의 촌티
정신이 변주를 일으킨 것이 지금의 엽기트렌드라고 해도 크게 틀린 것은 아니다. 엽기의 중심은 분명 '깸'에 있고 그것은 '거리'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나 그때나 아방~한 쌈지 문화운동의 이미지들 역시 지금은 '한엽기하네~'로 이해되지만 이전엔 분명 '촌스러운 것이 아름답다'였을 것이다. 만약에 5년 전이었다면
이박사풍의 광고들은 엽기광고라는 말 대신 '촌티광고'가 되었을 것이다.
** 물론, 그때 이 광고들이 나왔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유머도 종류가 많아서 황당하게 막가는 유머가 나오려면 그 전에 충분한 은근하고 재밌고 느릿느릿하고 다채
로운 유머들이 미리 뿌려져 있어야한다. 포화상태인 지금에야, 엽기광고가 나올 수 있는 것이다. **
'촌스러운 것이 아름답다'는 90년대의 강박증은 사실 [판관포청천]이 폭발적인 인기를 끌던 90년대 상반기부터 이미 시작이 되었다는게 내 의견이다. 그것은 단지
먹고살기 편해지면 어렵던 어린 시절이 아련히 생각나는 '향수 매커니즘'에 따른 것이었을까? 모든 촌스러운 것들, 선과 악이 분명한 듯 착각하던 시절에 대한 향
수였을까? 왜 하필 70년대였을까?
'경제성장' 한 마디 구호로 대변되는 70년대의 급속한 산업화 시절은 패기만만하면서도 촌스럽고, 성장하는 동시에 파괴를 자행하는 어설픈 시대였다. 80년대에 드
디어 구가하게 된 풍요의 시절, 그러나 억압과 테러의 시절에 대해서 많은 70년대생들은 한없는 지겨움을 느낀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잘난체 하지만 촌스럽고. (기억이 안 나더라도, 무의식적으로도 작용할 것이다.) 70년대도 촌스럽지만 거기엔
촌스러움을 용서받을 만한 무엇이 있었다. 그것이 자유와 사랑을 노래하는 젊은이들의 열정이 가득찬 시절이기도 하고, 단지 두 단계를 더 뒤로 간 시절에 대한 향
수이기도 하다. 90년대의 젊은이들이 80년대를 싫어한 것은 당연하다. 아직도 생각나며, 따라서 아직도 '지겹기' 때문이다.
** 만약 2000년의 첫십년 동안 이제부터 90년대에 대한 지겨움을 표명하는 세대가 자라나고 흐름이 형성된다면 과연 80년대를 향수하게 될른지 향수 자체에 대한 지
겨움을 가질런지에 대해서는, 모르겠다. **
사실 내가 제시하는 촌스러운 것이 아름다와지는 유행의 매커니즘은 k. 해리스가 [현대미술-그 철학적 의미]에서 보여준 키치가 어떻게 예술이 되는가 하는 얘기의
변형에 불과하다. 한 시대의 유행은 진심으로 아름답다. 다음 시대가 되면 그 매너리즘에 사람들은 식상하여 그걸 촌스럽다고 여기고 배척하게 된다. 그런데, 다음
시대가 되면 그 우스꽝스러울 정도의 진지한 양식이 재밌게 느껴지고 정겹게 보이기까지 한다. 만화같은 촌티패션이 그렇고, 인사동 골동품점에 가면 우리를 미소짓
게 만드는 아톰인형이나 갖가지 물건들이 그렇다. 새로운 것이 반복되면 지겨워지고, 한참 동안 잊혀진 다음에는 다시 새로워진다. 아주 단순한 진리다.
촌스러움을 알아보고, 그것에 웃음과 감탄으로서 반응하는 것이 이렇게 거대한 감각적 흐름을 형성하는 것은 어쩌면 대중교육이 널리 퍼진 후에야 가능한 것일지
도 모른다. 정말이지 요즘 사람들은 똑똑하다. 재미를 추구해도 지적으로 추구한다. 90년대 들어 영화에 만연하게 된 포스트모더니즘이란, 한 마디로 얘기해서 '자
기반영성'이다. 자기를, 지나온 역사를 되돌아본다는 얘기다. 지적 유행으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은 한국에선 이젠 완전히 한물이 간 듯이 보이는데, 문화 전체의 차
원에서 본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미 실현되었으므로 아쉬울 게 없는, 그런 상태라고 생각한다.
[펄프픽션]이 칸느에서 상을 받은 이후부터 무수히 생겨난, 내러티브를 가지고 장난치는 영화들이 복고풍 패션과 갖는 공통점은 모두 자기반영성을 갖고 있다는 점
이다. 자기의 장르를 의식하고 꼬아틀고 하며 장난치는 영화들 역시 마찬가지다. 끝간데 없는 패러디에다 오버의 한계에 도전하는 오버로 난장을 치는 주성치 영화
역시 같은 맥락을 지닌다. 언제라고 자기반영성이 없지는 않을테지만, 90년대에 들어서 영화에 만연한 것은 그럴 만한 조건들을 갖추었기 때문일 것이다.
촌스러움을 정겹게 받아들이거나 아예 엽기로 승화시켜 웃어제끼는 것은 젊은이들이 옛날을 이해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영화 [장군의 아들]의 세트를 그대로 이용
한 듯한 수많은 뮤직비디오들이 희망했던 따스하고 정겨운 느낌 역시 고난의 60년대가 되었든, 더 고난의 일제시대가 되었든, 지금 자신이 살고있는 이 모습이 어떤
과거로 인해 지금 이 모양으로 엮어졌는지에 대한 생각을 하게 하는 정서적인 자극을 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할만 하다.
복고풍 패션과 엽기 트렌드, 패러디와 자기반영성으로 충만한 영화들은 모두 유머를 둘러싸고 앉아 있다. 이 흐름은 어디까지나 나비처럼 날아가 벌처럼 콕 쏘아
버리는 일침의 순간을 공유하고 있고, 웃음이라는 지적인 쾌락을 공유하고 있다. 유머는 새로운 것을 좋아하며 낡은 것은 단지 '망각'이라는 과정을 통해서만 구원
받을 수 있다. 따라서, 엽기는 당분간의 유행을 거쳐 다음번에는 좀 다른 모습의 자기반영성으로 다시 등장할 것이라는 점을 우리는 예측해 볼 수 있다.
** 영화의 자기반영성, 복고풍 패션, 유머에 대한 더 자세한 얘기는 나의 '숭고-유머론'을 참고하시길. **
2000.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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