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lcome to
 Amalgam's
 Critic World





   Profile
   Book
   Column
   Art
  편지보내주세요. no spam! e-mail
  Link
  Board
   비누도둑
binudoduk
비누도둑 게시판
분자혁명
고구마   분자혁명 UserPreferences
 
Help Info Print View Search Diffs Edit
 제목   도움말   찾기   대문   바뀐글 

펠릭스 가타리

1장 분자혁명과 계급투쟁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똥 같은 상태로, 즉 각자가 사적이고 자책감에 사로잡힌 방식으로 <그것에서> 자신의 몫을 추출해야 하는 그런 미분화되고 탈코드화된 흐름flux의 상태로 환원한다.

먼저 대학의 "아카데믹한" 방법은 텍스트를 전체적으로 취하거나 버리는 것이다. 반면 정열적인 애호가의 방법은 자신에게 편리하게 텍스트를 조작하고, 자신의 좌표를 밝혀주고 자신의 삶의 방향을 지시하도록 사용하면서, 텍스트를 취하는 동시에 버리는 것이다. 유일한 문제는 텍스트가 작동하도록 하는 것이다.

바로 욕망의 사적 추구와 이해투쟁의 공적 영역을 분리시키는 이론적 관념은 암묵적으로 자본주의적 통합에 기여한다.

우리가 제기해야만 하는 문제는, 사회적 구도에서 욕망이 생산한 것-꿈, 사랑 행위, 구체적 유토피아-이 자동차나 주방기구와 같이 상업적으로 생산된 것과 동일한 실존가치를 획득할 수 있는가입니다.

정신분석은 자본주의적 아편입니다.

무의식은 언표의 사적 소유뿐만 아니라 욕망의 사적 소유를 결코 인정하지 않습니다.

정신분석은 자본주의에 대체종교로 기능합니다. 정신분석의 역할은 억압을 정돈하고, 억압을 '인격화'하는 것입니다.

반복은 차이의 시작입니다. 여기서 반복은 어떤 것의 종말, 과정의 멈춤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탈영토화의 문턱, 욕망하는 변이의 기호를 표시하지요.

  • 유전자 변이가 그렇고, 지식전수 과정이 그렇고, 모든 교류가 그렇다
  • 텔레토비가 정면에 내놓는 '반복'의 가치는, 비슷비슷한 얘기의 수많은 반복인 티비드라마가 은폐하는 반복을 부끄럽게 한다

그러나 현실적 생산은 반대로 자신을 구속할 뿐인 이러한 초코드화를 결코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산업사회에 있는 가장 거대한 생산기계들은 이러한 중앙집중제가 없더라도 충분히 기능할 수 있습니다.

고도로 발전된 산업과 정보처리의 발전이란 맥락에서조차, 우리는 욕망, 예술, 꿈의 생산과 대립되지 않는 색다른 생산관계를 구상할 수 있습니다. 바꿔 말하면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배타적으로 대립하는 것으로 파악하는 것을 피할 수 있느냐 여부입니다.

개인은 그 자체로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적합하도록 자본주의 체계가 만들어낸 것입니다.

인문과학의 연구에서 특권적 대상으로서 개인을 둘러싸고 만들어지는 모든 것은 개인과 사회적 장 간의 분리를 재생산할 뿐입니다. 예컨대 언어학이 개인간의 소통에 의해 자신의 연구대상을 정의하는 데 만족하는 한, 언어학은 언어가 지닌 사회적 통합과 강제의 기능을 전혀 찾아낼 수 없습니다.

어떤 집단이나 어떤 계급도 개인으로 구성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본주의 생산관계를-노동력 포획의 조건으로서 탈코드화된 개인들의 흐름을 생산하는- 욕망의 사회적 장 위에 각인한 것입니다.

무의식은 전적으로 긍정성이며, 정신분석이 그것에 투입한 표상 체계에 의해 결정되거나 통제되지 않는 흐름 및 강렬도intensite 기계입니다. 그러나 전이transfert라는 매개를 통해 정신분석은 그것에 부정성과 결핍을 끌어들입니다.

증오는 다르게 '가동되'면 사랑을 생산합니다.

현실의 장, 표상 즉 대표성의 장, 주체성의 장 사이의 3중 분할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집합적 배치는 주체인 동시에 대상이자 표현이다.

개인화된 언표행위는 지배적 의미작용의 포로이다. 오직 주체집단만이 기호적 흐름에 작용하고, 의미작용을 파괴하며, 언어를 다른 욕망에로 열고, 색다른 현실을 창조할 수 있다.

파시즘, 스탈린주의, 부르조아 민주주의 등의 모든 구조를 횡단하여 자신의 길을 추구하는 하나의 동일한 전체주의적 기계주의기계체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 상이한 전체주의 체계들은 대중의 욕망을 포획하는 상이한 정식을 생산하여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변형에 작용하였다.

이런 방대한 규모의 생산은 산업, 경제, 교육, 정보 등의 기계적 배치 안에서 작동하는 인간적 요소를 더없이 강하게 분자화되도록 자극하였다. 노동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이는 욕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기관들과 기계들의 배치이다.

  • 누가 가치를 생산했는가를 따지는 것은 억지논쟁이 된다. 사용가치에 맞먹는 교환가치를 부여하고, 노동에 알맞은 대가를 지불하려는 꿈 역시 그렇다. 문제는 욕망과 노동의 모순 없는 배치?이다

생산력은 이제 전통적 인간적 영토성을 부수는 대신, 욕망의 '분자적' 에너지를 해방할 수 있다.

2장 사법과 일상적 파시즘

인간은 고독 속에 빠져서, 목적지가 없는 욕망에 이끌려 질서란 없다고 하면서도 '환경'이라는 것을 만들어내어, 뭐랄까 자신의 정체성 같은 것을 만들어낸다.

책임을 개인에게 돌리고, 유죄를 병원균에 의한 것으로 보고, 또 비사회적이고 억압적인 환경을 바로잡는다는 이러한 정치에 대한 대안을 구상할 수 있는가?

  • 새로운 몸과 마음, 생태의 개념

사람들은 욕망의 표현은 무질서, 비합리성과 동의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배적인 모델이 통용되도록 욕망에 강요하는 신경증적 질서가 진정한 무질서, 진정한 비합리성을 이룬다.

바로 억압이 성애를 부끄러워하게 만들고 완전히 공격적인 것으로 만든다.

인간과 기계 모두를 쫓아내는 것을 멈춰라. 그들의 관계는 욕망 그 자체를 구성한다.

  • 녹색운동, 모든 환경주의에 주의. 실제로 그들의 핵심개념을 형성하는 것은 뇌중심의 정신주의일 수 있다. 식물은 생명으로 치지 않는 것이 그 증거다. 채식주의는 무척 경건하고 전투적이나 너무 편협한 시각에 의존한다. 무조건적으로 지구, 환경을 보호할 것을 주장하는 것은 자만과 착각의 산물이다. 인간은 생태계 안에서 태어나 그것을 멸망시킬 수 있을 정도로 '큰' 종족이며, 인간과 생태계는 공진화하여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 될 것이 아마도 예상된다

  • 사이버펑크는 가속화되는 인간-기계의 친화의 문화적 표현이다. 그것은 비인간화의 표식이 아니며 노예적 인간의 생활양태에서 벗어나 다른 생활양태를 찾아가는 과정의 폭발하는 정서를-기쁨과 두려움을- 보여준다

3장 탈주하기

행태주의는 외적 자극과 주체의 대응 사이의 상호작용으로 규정된 행동에 대한 연구로 심리학을 환원하는 20세기초의 이론이다. 오늘날의 신행태주의는 모든 수준에서의 사회정치적 권력의 문제를 무시하면서 인간의 모든 문제를 소통과 정보의 문제로 환원하는 경향이 있다.

가족주의는 사회적 현실을 마술적으로 부인하고 현실적 흐름과의 모든 접속을 피하는 것을 의미한다.

해석: 어떤 것은 항상 그 자체와는 다른 것을 의미해야 한다.

  • 표현의 함정. 그래서 우리는 생계를 위해 일을 하며 다른 곳에서 자아실현을 시도한다. 노동은 언제나 의미를 외부에서만 가져올 수 있다
  • 그래서 텔레토비는 위대하다.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이해되며, 즐겁다

아무것도 무의식 속에서 발견할 수 없다. 무의식은 여전의 구성되어야 한다.

죄는 자본주의의 탈영토화된 흐름에 연접될 때 리비도의 특정한 형태-자본주의적 에로스-가 된다.

  • 금지된 술과 담배, 마약, 섹스는 모든 일탈자 및 휴식하는 중의 사람들에게 쾌락이 된다. 이것은 인간 본연의 것도 단지 조작된 욕망도 아니며 자본주의적 감수성에 따른 것이다

정신분석가와 피분석자는 둘다 임금을 받아야 한다.

사람들은 '욕망의 논리'가 우리들을 유혹한다기보다는 욕망의 논리를 따르는 것을 받아들이는 조건에서만 그 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다.

  • 바로 이것이다. 이것 없이는 자본주의나 가부장제나 어떤 것도 극복할 수 없다. 치고 얼르는 식의, 자본주의가 허락하는 '제한된 욕망' 안에 갇혀있을 때는 욕망을 문제아, 죄로 보기 쉽다. 이것을 빠져나와 모든 것의 원동력이 무엇인지, 무엇이 이것을 가로막고 통제하는지를 알아야만 해결을 볼수 있다

무의식은 개인 속에서나 사회체 속에서나, 표상 속에서나 생산 속에서나, '언어적인 것' 속에서나 경제적인 것 속에서나 완전히 같다.

권력은 사람들이 억압을 더 쉽게 내재화할 수 있는 방식으로 억압을 적용한다.

  • 우울증은 어떤 증거라고 본다. 조울증도 그렇다. 모든 것을 개인의 권리와 책임과 문제로 받아들이는 현대인이 갖는 과부하의 결과다
  • 이지메는 유치하고도 확실한 권력관계인데, 이는 획일적이고 억압적인 제도-가정의 교육과정 속에서 나름대로 사회화되어가는 청소년들의 방식이다

생산력에 의해 가공되는 것은 실제로 원재료나 전기나 인간노동의 흐름 뿐 만 아니라, 지식의 흐름 혹은 집단적 태도나 계급제도에의 복종태도를 재생산하는 기호적 흐름 등이다.

  • 맑스가 죽은지 벌써 한 세기가 되었는데도 상품의 가치를 생산하는 것을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노동으로 한정하여 이를 꿋꿋이 지키는 것은 심각한 무능력이다. 가치를 생산하는 것은 모든 재생산 과정을 포함하며, 상상력이 잉여-부가가치를 생산하는 것은 기계화과정이 생산하는 것만큼 명백하다.

이처럼 어린이들의 표현, 그들의 폭력은 정상이라고 자칭하는 어른들이 갖는 표상이나 모델에 의해 조건화되고 있다. 자유롭다는 것은 술을 마신다든가, 어른의 외설적인 섹스에 열중하는 것이다.

  • 포르노는 많은 여성들에게 혐오감을 준다. 기본적으로 여성은 자신을 가장 먼저 여성으로서 개념화하기 때문에, 단지 여성이 섹스머신이나 분열적 육체로 탐닉, 소유의 대상으로 취급되는 것을 참을 수 없기 때문이다. 혐오감을 극복한 여성들은 자본주의의 에로스에 적응하였다고 보면 된다

자본주의 기반의 하나를 이루는 성적 소외는 사회적 신체가 낭성성 쪽에 기울어지고 있는 반면 여성적 신체는 탐욕의 대상, 상품으로 변형된다는 것을 함의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탐욕의 대상, 상품에 대해 죄책감을 지닌 채 접근할 수 있을 뿐이며, 체계의 모든 톱니(결혼, 가족, 노동 등)에 복종하게 된다.

실제로 욕망은 남성의 신체에서 떨어져나와 여성 쪽-아주 정확히 말하면 여성 되기의 방향-으로 간다.

  • 남성이 스스로에게 부여된 역할에서 벗어나 아름다움을 추구할 때, 그 아름다움은 어디까지나 여성을 참조한다 see also [WWW]여성적시선

여성은 성적 착취를 당함에도 불구하고 욕망과의 사이에 얻던 일정한 진실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 그리고 이 관계를 여성은 본질적으로 자신의 신체 수준에서 맺어간다.

  • 그렇기에 여성은 욕망의 대상을 깎아내리지 않는, 진지한 쾌락의 시각을 가질 수 있다. 이것으로서, 여성은 죄책감의 쾌락에서 벗어나 분열적이고 풍부한 쾌락을 가질 수 있다. 이를테면, 여성들의 시선은 미소년을 아름다운 자로서, 고귀하게 만든다. 이는 남성들의 시선이 아름다운 여성을 한낱 물건으로 만드는 관행과는 전혀 다르다.

기호화가 붕괴되는 곳이라면 어디든 간에 유성화(sexualization) 또한 붕괴됩니다.

  • 나의 쾌락론?도 이에 걸쳐있다. 죄책감이나 비일상적 흥분과 관여하지 않는 쾌락들이 더 크다. 많다?

4장 영화:소수예술

산업사회에서 생산력 발전은 (관료적 사회주의에서처럼 자본주의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욕망에너지의 솟구치는 해방을 포함합니다.

(영화, 텔레비전, 신문) 그것들은 의사소통이나 정보전달의 수단이기 이전에 권력도구입니다. 그것들은 메시지를 전달할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리비도에너지를 가공합니다.

자신의 고대적 정식에서, 권력은 구별되고 육체화구체화?되고 제도화된 신을 귀착되는 아버지-주인-왕 등의 계열체적 계열에 근거합니다. 자신의 실제적인 정식에서, 육체화는 탈영토화되고 탈중심화되었습니다.

구조주의는, 정신분석에서 이름 없는 신을, 교회의 신, 가족의 신으로 대체하려는 시도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구조주의는 의미작용에서 빠져나가려는 모든 기호체제 속에 의미작용을 주입하려고 체계적으로 노력합니다.

그럼에도 영화의 적절한 효과는 계속해서 전-기표적인 상징적 구성 요소와 비기표적 구성 요소에 좌우됩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텔레비전이 영화를 흡수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사실 그 역능이 그리 강하지 않는 상업영화의 정식에 종속되었다는 점입니다. 이런 조건에서, 포르노영화 영역에서 자유화를 이루려는 시도는 상대적으로 부차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모든 맥락-그리고 영화에 대해서 이것은 진실일 뿐만 아니라-에서 단절된 에로스에 욕망의 미시정치적 투쟁을 한정하려는 어떤 것도 함정인 것 같습니다.

  • 일탈은 종속으로 되돌아 간다

즉 욕망은 성적이지 않고, 횡단성애적(transexuel)입니다.

결론적으로 저는 영화가 에로스기계, 즉 억압을 내면화하는 기계이기도 하고 욕망해방의 기계일 수도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5장 기호적 구축물

모든 권력구성체는 내용의 잉여성 체계를 조직한다

정신분석은 정상을-인간 행동에서 정상적인 것과 병적인 것 사이의 경계-정의하고자 했던 한 정치적 영역으로 미끌어져 갔다

지난 시기에는 종교적 또는 철학적 논쟁이 오늘날 정신분석이 사회투쟁의 장과 맺는 동일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정신분석은 과학이 아니라 특정한 시기와 주어진 맥락에서 규제모델을 제시하는 모든 다른 운동과 똑같이 다루어져야 할 정치종교적 운동이다. 정신분석의 욕망 개념은 외관상으로만 '그 시대를 앞서간다'

나는 여기서 두 가지 현실, 즉 객관적인 현실과 주체적인 현실 사이의 대립을 거부하고, 그것을 두 가지 가능한 정치로 대체하겠다. 과거로 회귀하고 상상계에서 전개되는 해석의 정치와 욕망의 현동적 강렬도를 장악하며 역사적.사회적 현실과 접촉하여 욕망하는 기계주의로 구축되는 실험의 정치가 그것이다.

퍼스는 관습적인 것으로 보고 소쉬르는 자의적인 것으로 보는, 기표와 기의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기호에 의한 권력 표현일 뿐이다.

의미작용의 구성, '이해해야' 할 것은 권력의 일로 남아 있어야 한다

표현도구는 삽과 곡괭이가 죄수에게 주어지는 것과 똑같이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에게 제공되고 있다

이런 상호 커뮤니케이션 조지의 '의미론적' 전제는, 현전하는 개인들은 '그 상징들에 부여한 의미작용에 대해 미리 일치한다'는 생각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행위는 정보의 흐름으로 환원되거나 적어도 그 흐름에 종속된다.

사람들은 기계학을 찾는 데 착수한다. 기계학은 기계가 아니다. 기계는 아주 다른 것이다!

기계학은 ... 연구자들로 하여금 모든 정치적 책임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책분류 자본주의분류


아말감 FindPage by browsing, searching, or an index
Or try one of these actions: LikePages